얼마 전 방영된 서바이벌 예능 ‘흑백요리사’는 재야의 고수 ‘흑수저’ 셰프들이 스타 셰프 ‘백수저’들에게 도전장을 내민 요리 계급 전쟁을 표방하며 인기몰이를 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SBS문화재단 후원을 받아 수여하는 ‘올해의 작가상’이 올해는 ‘미술판 흑백요리사’ 같은 모양새가 됐다. 이 상은 후보 4명 간 전시 경합을 통해 최종 수상자를 가린다. 최종 승자는 미술계 올림픽으로 불리는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대표 작가로 직행하는 게 통상의 수순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권하윤(43), 양정욱(42), 윤지영(40)과 함께 이미 2019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대표 작가로 선정됐던 제인 진 카이젠(44)도 후보에 포함됐다. ‘체급이 다른’ 작가끼리 경합을 붙인 게다. 그러니 ‘미술판 흑백요리사’라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어색한 조합이 도출된 이유를 미술관 측에 물었더니 “미드 커리어(중견)를 후원하는 현대차 시리즈 프로그램이 없어져서…”라는 궁색한 답이 돌아왔다. 미술관은 지난 10년간 현대차의 도움을 받아 매년 1명의 중진 작가(대체로 50대)를 뽑아 대규모 개인전을 열어줬다. 지원금 규모는 10억원씩 총 100억원이다. 이불, 김수자, 양혜규 등 쟁쟁한 작가들이 수혜자였다. 그 현대차 시리즈가 지난해로 끝난 것이다. 이 같은 ‘흑백요리사’식 이상한 경연이 한국의 현대미술 후원에서 멀어지는 국내 기업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 같아 씁쓸하다.
현대카드가 신예 건축가를 발굴하도록 지원하는 ‘현대카드 컬처 프로젝트-젊은 건축가 프로그램’(2014∼2017)은 진작 끝났다. 건축가들은 미술 전공자와는 다른 감각으로 현대미술의 영토를 확장시켰다. 그들의 작품들이 자리했던 국립현대미술관의 삼청동 마당은 지금은 땡볕만이 빈터를 지킨다.
국내 후원에 대한 축소 움직임과 달리 기업들은 해외 미술관 후원에는 아주 적극적이다. 현대차는 지난 2월 미국 뉴욕 휘트니미술관과 10년 장기 후원 협약을 체결하고 휘트니 비엔날레를 2032년까지 다섯 차례 지원키로 했다. 현대카드는 2006년부터 뉴욕 현대미술관(모마)과 협약을 맺어 다양한 형태의 후원 및 협업을 지속하고 있다. LG전자는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 깃발을 꽂았다. 상금 10만 달러(약 1억3300만원)의 ‘LG 구겐하임 어워드’를 신설해 5년간 후원한다.
‘더 많은 방문객이 몰리는 곳에 기업의 깃발을 휘날리자!’라는 생각일 게다. 투자 대비 회수율을 중시하는 게 기업의 속성이니 뭐라 할 수는 없다. 이미 현대차는 영국 테이트모던미술관 터바인홀 전시 작가 후원을 통해 예술을 사랑하는 글로벌 기업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럼에도 한국 미술 후원에 기업의 애국심이 아직은 작동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과거 스크린쿼터제가 한국 영화의 글로벌 경쟁력을 키우는 데 일조한 것은 누구나 안다. K아트가 글로벌 시장에서 체급을 키우기 위해서는 아직은 한국 기업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혼자서 힘들다면 팀플레이는 어떨까. 국립중앙박물관 후원 조직인 ‘국립중앙박물관회 젊은 친구들(YFM)’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외규장각 의궤실’을 조성한 사례는 참고할 만하다. 외규장각 조선왕실의궤는 병인양요 때 무단 반출됐다가 145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소중한 기록유산이다. 아무리 귀해도 달랑 책자만의 전시로는 역사적 깊이와 아우라를 느끼기 쉽지 않다. 실제 전시에 나온 실물은 ‘장렬왕후존숭도감의궤’ 등 8책에 불과하다. 하지만 게임 업체인 컴투스 송병준 의장 등 젊은 기업가 중심으로 구성된 YFM이 쾌척한 9억원 덕분에 놀라운 공간이 조성됐다. 우리 기업의 국립현대미술관 후원에서도 집단적인 힘이 발휘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