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내각 ‘의회 패싱’에 불신임안 발의… 정부 붕괴 위기

입력 2024-12-04 01:20 수정 2024-12-04 01:20
미셸 바르니에 프랑스 총리가 2일(현지시간) 하원에 출석해 사회보장 재정 법안 처리 방침을 설명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취재진에게 정부 불신임 의지를 밝히는 마린 르펜 국민연합(RN) 하원 원내대표. 로이터, EPA연합뉴스

프랑스 정부가 2일(현지시간) 하원 표결 없이 사회보장 재정 법안을 처리해 정국이 대혼란에 빠졌다. 야권은 ‘의회 패싱’에 강력히 반발하며 정부 불신임안을 발의했다. 불신임안은 표결에서 가결될 가능성이 크다. 정부가 붕괴 위기에 몰린 것이다.

미셸 바르니에 총리는 이날 헌법 제49조 3항을 발동해 내년도 예산안 가운데 핵심인 사회보장 재정 법안을 통과시켰다. 야당의 반발로 예산안 처리가 어려워지자 내놓은 초강수였다. 헌법 제49조 3항은 정부가 긴급한 상황이라고 판단했을 때 의회의 승인을 받지 않고 법안을 처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해 연금개혁 법안도 이 조항을 발동해 처리했다. 당시 내각 불신임안은 부결됐지만 프랑스 전역에서 시위가 일어나며 진통을 겪었다.

바르니에 총리는 이날 하원 연설에서 “프랑스 국민은 정쟁에 따른 피해를 감당할 수 없다”며 “국가의 미래를 위해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좌파 연합 신민중전선(NFP)과 극우 국민연합(RN)은 정부가 의회를 무시하는 행태라고 비판하며 즉각 불신임안을 발의했다.

해당 법안에는 건강보험과 국민연금 등 사회보장 시스템의 재정 수입과 지출을 관리하는 예산안이 포함돼 있어 극우 정당의 반대가 극심했다. 마린 르펜 RN 하원 원내대표는 “국민의 뜻을 대변하기 위해 불신임 표결을 강행할 것”이라며 “국민의 희생을 강요하는 정책은 용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앞서 RN은 법안 통과 조건으로 이민 지원금 삭감과 연금 지급액 인상 연기를 요구했다. 이에 바르니에 정부가 불법체류자 의료보장 축소 등 일부 사안을 양보했으나 최종 합의에는 실패했다.

NFP는 정부가 극우 정당과 협력하는 점을 문제삼았다. NFP 내 극좌 정당인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의 마틸드 파노 원내대표는 “바르니에 정부는 극우와 타협하는 불명예를 안았다”며 정권교체 의지를 드러냈다.

바르니에 내각은 지난 9월 출범 이후 줄곧 불신임 위협을 받아왔다. 뱅상 마르티니 니스대 교수는 “현재 프랑스 정치 상황은 ‘혼돈의 연합’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며 “정부의 생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분석했다.

현재 하원 구성상 좌파 연합과 RN 및 동조세력 의석 수를 합하면 불신임안 가결 정족수를 훌쩍 넘는다. 불신임안이 통과되면 바르니에 내각은 즉각 총사퇴해야 한다. 프랑스 제5공화국 이래 정부가 의회의 불신임을 받아 해산된 경우는 1962년 조르주 퐁피두 총리 때가 유일하다. 바르니에 내각이 해산된다면 그로부터 62년 만이다. 이 경우 바르니에 정부는 제5공화국 사상 최단명 정부로 기록될 전망이다.

헌법상 마크롱 대통령은 2025년 7월까지 의회를 해산할 수 없어 정치적 교착 상태가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다. 정치학자 니콜 바샤랑은 “우리는 예산도 없고 정부도 없고 내일을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최민우 기자 cmwoo1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