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지난 2일(현지시간) 인공지능(AI) 개발에 필요한 핵심 부품인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첨단 반도체장비의 대중국 수출을 통제하는 새 조치를 내놨다.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만든 제품이더라도 미국산 소프트웨어나 장비가 쓰였다면 수출이 통제되는 규칙이 적용됐기에 미·중만의 문제가 아니다. 현재 HBM 시장은 SK하이닉스가 약 54%, 삼성전자가 41%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한국 업체들이 독점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분야인 만큼 정부가 이번 조치를 철저히 분석해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정부는 이번 조치가 국내 업계에 미칠 영향은 적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업계 1위인 SK하이닉스는 HBM을 주로 미국의 엔비디아에 공급하고 있고, 첨단 반도체장비 규제에 적용되는 국내 기업은 소수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안심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당장 메모리 반도체 1위 삼성전자의 경우 HBM 매출의 중국 비중이 20%안팎인 것으로 알려졌다. 고사양 HBM 시장의 대부분을 SK하이닉스가 점유한 상황에서 저사양 HBM의 주요 고객인 중국에 대한 수출이 막힌다면 최근 위기론에 휩싸인 삼성전자에게 엎친 데 덮친 격이 될 수 있다. 또 중국이 세계 반도체 소비의 절반을 차지하는 최대 시장이란 점에서 장기적으로는 이번 조치가 지속될 경우 국내 업체들의 매출 감소와 반도체 생태계 위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번 조치는 바이든 행정부의 마지막 제재가 될 전망이지만 이게 끝일 것으로 여기는 이는 거의 없다. 도널드 트럼프 차기 정부의 대중 규제는 훨씬 거칠고 집요할 가능성이 높다. 외교적 대응에 빈틈이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한다. 그런 점에서 반도체 장비 수출국인 일본과 네덜란드는 이번 대중 수출 통제 조치의 예외가 된 반면, 한국은 면제국 대상에서 빠진 점은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대중 의존도를 낮추고 시장을 다변화하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대미 외교 역량을 강화하지 않는다면 말짱 헛일이 될 수 있다.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트럼프 정부를 상대할 때는 더욱 그렇다. 민·관·학 전문가들의 상시적 대응 체계를 갖추는 것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