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사람의 가치

입력 2024-12-04 00:31

“너도 대한민국을 지켰고 나도 대한민국을 지켰다. 계급과 직책을 떠나 우리가 또 대한민국의 하루를 적으로부터 지켜냈다. 고맙다!” 강원도 화천에서 근무한 모 사단장의 이야기다. 그는 부하들이 근무나 훈련을 마치면 “모두 이 나라를 지키는 일에 동참했다”고 말했다고 했다. 모든 부대원이 자신의 가치를 느끼게 해주는 순간이다. 참 아름답다!

그는 대대장 시절 부대원들이 부대 적응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오래 고민했다고 한다. 그의 대응 방식은 충격적이었다. 대대장 사무실 앞에 자신의 전역 지원서를 붙여 놓았다. 그 옆에 건의함을 두고 누구라도 행복하지 않은 점을 적어 넣으라고 했고, 자신이 해결하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 후에도 행복하지 않으면 누구라도 대대장 전역서를 상급 부대에 제출하라고 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병사와 간부들은 날마다 스스로 행복한 일을 하나씩 수행하고, 그때마다 전역 지원서에 하트 모양 스티커를 붙여 글자들을 지워나갔다. 첫날 ‘전’ 자에, 둘째 날에는 ‘역’ 자에, 그다음 날은 이름 위에…. 그렇게 부대원들은 전역 지원서에 있는 모든 글자를 하트 스티커로 덮어버렸다.

이 이야기처럼 사람의 가치는 사람으로 서로 만날 때 비로소 느끼게 된다. 이런 사람들의 모임은 딥페이커를 이용한 가짜뉴스로도, 적의 심리전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믿음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쌓은 신뢰와 단결은 어떤 무기로도 깨뜨릴 수 없다. 사람들이 서로의 가치를 존중하고, 믿음을 만들어내며, 어떤 조건에서도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은 어떤 논리나 감동적 연설로도 만들 수 없다.

일상적으로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 아닌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놀랍게도 우리는 사람 대신 사회적 역할로 만날 때가 훨씬 많다. 이런 역할의 만남은 개인의 사회적 지위·직책, 혹은 성취 기준에 따라 만들어진다. 역할의 만남은 항상 상하 관계가 있다. 대화는 주로 지시, 교육, 충고, 명령, 설득, 협상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항상 뛰어넘을 수 없는 경계가 생긴다.

우리 사회는 역할로 사람을 대하는 일에 익숙하다. 대통령과 국민, 국회의원과 유권자, 교사와 학생, 경영자와 근로자도 역할로 만난다. 이들 간에는 침범할 수 없는 경계가 있어 서로 만나기 어렵다. 역할의 만남에서 상호 신뢰는 계약으로만 가능하다. 이런 만남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만나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을 찾으며 함께 미래를 만들어가는 일이 불가능하다. 역할 중심 사회는 효율적일 수는 있지만 행복한 사회는 아니다.

이제 우리는 대한민국이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인지 물어봐야 한다. 그런 곳으로 만들려면 대통령, 정부, 여야 모두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자신이 하루를 살아내도록 모든 국민이 헌신하고 있음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국민의 하루가 자신의 하루만큼 소중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모두가 나라를 위해 애쓰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교사는 자신의 하루만큼 학생 또한 소중한 하루를 보내고 있음을 느낄 때 함께 만드는 미래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다. 기업가는 근로자의 하루 손길이 자신의 경영 능력을 가치 있게 만듦을 인식해야 한다. 물론 그 역으로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사람으로 또 다른 사람을 만날 때 모든 것이 아름다워진다. 사회적 갈등, 조직 내 불협화음, 대인 간 오해, 가족의 불화, 낮은 능력과 열등감도 아름답게 느낄 수 있다. 누군가 언덕 위로 손수레를 끌고 올라갈 때 아무 조건 없이 뒤에서 밀어주고 나면 왠지 모르게 마음에 기쁨이 가득 차오르는 것처럼. 나는 지금 이 순간 귀한 독자들이 이 글을 읽음으로써 내가 있음을 느끼고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가득 찬다.

차명호 평택대 상담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