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장안에 가난한 이들 있으니

입력 2024-12-04 00:35

서설 속에 감춰진 어려운 삶
생각한 옛 시인… 이면의
고통 되새기는 게 문학 역할

눈앞이 온통 가물가물할 정도로 기록적인 폭설이 내리던 날, 하필이면 나는 비행기에 앉아 이륙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떠나는 도쿄 출장길이었고, 서너 시간은 족히 기다렸지만 상황은 딱히 나아지지 않았다. 비좁은 좌석에서 온몸을 뒤틀다 보니 출장이고 뭐고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한숨을 쉬며 창밖을 바라보다 대학 시절 배웠던 시를 떠올렸다. 한시를 강독하는 수업이었고, 정년을 앞둔 노교수가 우리를 가르쳤다. 그는 옛 서당 훈장처럼 장단에 맞춰 시를 읽었다. ‘盡道豊年瑞(진도풍년서)/ 豊年事若何(풍년사약하)/ 長安有貧者(장안유빈자)/ 爲瑞不宜多(위서불의다).’ 그가 먼저 읽으면 우리도 크게 따라 읽곤 했다.

시의 제목은 ‘雪’(눈 설), 당나라 시인 나은이 지었다. 뜻은 이렇다. ‘풍년이 든다 모두 말하네/ 풍년이 뭐 어쨌다는 건가/ 장안에 가난한 이들 있으니/ 상서롭다는 말도 너무 많아서는 안 된다네.’ 노교수는 지루해하는 우리에게 이렇게 덧붙였다. “여러분, 눈이 오면 좋죠? 시골집 강아지도 뛰어다니고, 아이들도 눈싸움하고, 부자들은 스키도 타러 가고. 하지만 산동네 비탈길에는 연탄 나르는 아주머니도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1000여년 전 나은의 삶은 곤궁했다. 스무 살부터 진사시에 응시해 열 번이나 낙방했고, 여기저기 관직을 얻어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성격도 좀 까칠했던 모양으로 재주만 믿고 다른 이를 업신여긴다는 평이 기록에 남아 있을 정도다. 하기야 눈이 온다고 기뻐하는 사람들 면전에 훈계를 늘어놓는 사람의 성격이 오죽했을까 싶다.

하지만 이런 것이야말로 문학의 중요한 역할이다. 작가 한강은 딸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기뻐 마을 잔치를 열려고 했던 아버지를 주저앉혔다. 세계 곳곳에서 전쟁으로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무슨 잔치를 하냐는 것이었다. 이렇듯 문학이 마냥 기쁨과 즐거움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전쟁의 승리를 칭송하고 강자 앞에서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문학도 있다. 하지만 어떤 문학은 기쁨 앞에서 굶주림을, 즐거움 앞에서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그로 인해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실낱같은 노력을 이어갈 수 있다.

한시 수업에서 내가 받은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옛 문장을 진득하게 파고드는 성격이 못 됐던 탓이다. 하지만 매년 첫눈이 오면 나은의 시를 중얼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장안에 가난한 이들 있으니’ 하는 구절을 떠올리면 하얀 눈에 덮인 풍경에 감춰진 이들의 삶을 조금쯤 생각하기도 한다. 거리에서 잠을 자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하루하루 일거리를 구하는 이들은 무사히 품삯을 받아 아이들에게 돌아갔을까.

기후 위기는 우리 모두를 겨냥하지만 취약한 이들에게 훨씬 무겁고 가혹하다. 고통은 지붕에 쌓인 눈이 녹아 집안으로 스며들듯 자연스럽게 낮은 곳을 향한다. 우리는 그것이 환경 문제가 아니라 불평등 문제라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모두 상서로운 풍경에 기뻐하는 순간, 이면의 고통을 떠올리게 하는 불편함이야말로 문학이 지닌 중요한 역량이다.

몇 년 전 나은의 시가 지닌 미덕이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그는 ‘상서롭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네’가 아니라 ‘상서롭다는 말이 너무 많아서는 안 된다네’라고 썼다. 기쁨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기뻐하지 않도록 자중하는 것이다. 20여년 동안 이 시를 떠올리며 기뻐하면서 가난한 이들을 생각하는 것이 아예 기뻐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기쁨이 없다면 우리는 지나친 엄숙주의와 비장함에서 자신을 지켜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뻐하는 일을 완전히 포기해서는 안 된다. 눈은 잦아들었지만 창밖은 여전히 혼잡했다. 지연된 비행기들과 분주히 오가는 자동차, 깃발을 흔드는 사람들 모습은 재난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승무원들은 묵묵히 초콜릿과 물을 나눠줬다. 폭설로 온통 뒤덮인 새하얀 공항의 풍경은 기묘하게 아름다웠다.

김현호
사진비평가
보스토크 프레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