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문화] “오리가 아니라… 그게 진짜인지 증거하는 물의 파문 그린 것”

입력 2024-12-04 00:30
이강소 작가가 지난달 17일 개인전이 개최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전시장에서 포즈를 취했다. 작가 뒤 작품은 사슴 그림을 통해 회화성을 탐구한 ‘무제-91193’(1991, 캔버스에 유채, 218.2×291㎝)이다. 권현구 기자

사진 속 누드 퍼포먼스의 주인공은 1977년 당시 34세의 청년 작가 이강소. 그는 알몸에 물감을 잔뜩 묻힌 뒤 천으로 닦아냈다. 천에 묻은 물감은 그 자체로 회화가 되지만 동시의 작가의 존재 자체를 증거하는 흔적이기도 하다.

누드 퍼포먼스인 ‘페인팅(이벤트 77-2)’(1977).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제는 81세가 된 한국의 70년대 실험미술의 또 다른 거장 이강소 작가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개인전 ‘이강소: 풍래수면시(風來水面時)’를 한다. 전시를 기획한 이수연 학예사는 당시의 퍼포먼스 사진과 천 조각을 보여주는 것으로 도입부를 연다. 전시를 읽는 방향타 역할을 하는 작품이어서다.

이강소는 1975년 제9회 파리비엔날레에 초대돼 살아 있는 닭을 전시장에 풀어놓았던 생뚱맞은 작가였다. 일정 시간이 경과 후 닭을 농장에 돌려보내지만, 닭의 흔적은 남는다. 전시장에 뿌려놓은 흰 횟가루에 닭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찍힌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서다. 그는 73년 명동화랑에서 연 첫 개인전에서는 선술집을 차렸다. 이렇듯 청년 시절 설치미술과 퍼포먼스 등을 하며 전위적인 행보를 한 그였지만 대중에게는 ‘오리 작가’로 각인이 돼 있다. 80년대 후반 들어 시작한 오리 회화 연작이 시장에서 잘 팔리는 바람에 그리됐다. 전위성을 가릴 수 있는 별칭이라 억울할 법하겠다.

이번 전시는 ‘전위 선언서’ 같은 도입부의 저 퍼포먼스 작품이 말하듯 이강소가 회화에서도 얼마나 전통을 깨려고 노력했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만나는 오리 그림은 물속의 오리를 단순히 닮게 그린 ‘재현적인’ 붓질이 아니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수긍하게 되기 때문이다. 몸에 묻은 물감을 닦아낸 천 조각도 일종의 회화였던 것처럼 끊임없이 회화의 개념에도 균열을 내고자 했던 시도의 하나였던 것이다.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회화라는 게 자기 정서를 강압적으로 관객에게 전달하는 측면이 있지 않나. 그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회화 시스템을 달리 생각해보자, 캔버스가 뭔지부터 따져보자 싶었다”면서 “그래서 처음 캔버스의 천을 한 올 뽑고 두올 뽑으니 그게 작품이 됐다. 물감을 안 묻혀도 작품이 됐다”고 했다. 65년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그는 70년대 서울대 중심의 ‘신체제’, 홍대와 서울대가 함께 한 ‘AG’ 등 여러 단체에서 활동하며 전통 미술에 저항했다.

그렇다면 대중에게 사랑받는 오리 회화의 전위성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나는 오리를 그린 게 아니었어요. 저 오리가 진짜인가? 그걸 증거 하는 것은 오리 주변의 물의 파문이지? 그래서 그걸 그린 겁니다.”

작가는 80년대 후반부터 오리와 함께 집, 배, 사슴 등을 단색의 선으로 속도감 있게 그리는 구상회화를 했는데, 이렇게 깊은 뜻이 있다. 사슴 연작 역시 자세히 보면 사슴의 뿔과 고개의 형태가 동시에 여러 시공간에서 보듯 겹쳐 있다. 사슴이라는 존재의 흔적을 작가 특유의 방식으로 제시한 것이다.

회화 ‘강에서-99215’(1999, 캔버스에 아크릴릭 물감, 259×194㎝).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캔버스에 물감으로 대상을 그리는 회화적 실험은 80년대 시작됐다. 처음에는 어떤 의도도 없이 선을 수직이나 수평으로 그어도 사람들이 산이나 바다를 연상하게 되는 회화에서 출발했다. 그러던 것이 99년 무렵에는 글씨를 휘갈겨 쓰듯 그린 추상화로 나아갔다. 작가는 여기에 ‘강에서’ ‘섬에서’ 등의 제목을 붙였다. 실제 강과 섬을 묘사하지 않아도 제목만으로도 강이나 섬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이는 관객과 소통하는 그림을 추구한 회화 실험의 연장선에 있다.

“근대미술이라는 것은 인간 중심적입니다. 자기중심적이에요. 내가 있으니 세계가 있다. 너무나 시건방집니다.”

1975년 파리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일명 닭 퍼포먼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3전시실이 이처럼 회화의 실험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4전시실은 퍼포먼스와 설치미술 등을 중심으로 배치했다. 75년 파리비엔날레에 닭 퍼포먼스와 함께 출품한 사슴 드로잉 안에 사슴 뼈를 놓아 사슴을 증거 하는 설치 작품이 나왔다. 또 박제된 꿩을 설치하고 발자국을 동시에 찍어 마치 꿩이 살아 있는 듯 착시를 일으키게 하는 작품, 대나무를 세워놓고 석고를 발라 움직이지 못하게 함으로써 ‘흔들리는 대나무’ 고정관념을 깨는 작품 등도 볼 수 있다.

“대나무는 움직이지 않아요. 고요하게 서 있습니다. 보는 사람만이 움직일 뿐입니다.”

당시 아방가르드 미술의 산실은 서울이 아니라 대구였다. 그 중심에 이강소가 있었다. 미대 졸업 후 신체제, AG 등 그룹 활동을 하던 그는 돌연 낙향했다.

“처음엔 그룹 활동을 하며 다들 비엔날레처럼 크게 하자며 의기투합했지만 잘 안됐어요. 인적 갈등이 있었지요. 그래서 대구로 내려갔습니다. 약전골목 2층에 학원을 차렸는데, 이곳에 사랑방처럼 이명미, 김영진, 최병소, 박현기 등 지역 작가들이 모여들며 현대미술을 소개하는 장소가 됐습니다.”

그렇게 해 제1회 현대미술초대전(73년), 한국실험미술작가전(74년)이 대구에서 열렸다. 그는 이 시기의 개념적 미술을 일컫는 실험미술이라는 용어도 여기서 생겨났을 거라고 했다. 이어 대구현대미술제(74∼79년)가 열리게 됐는데, 이는 백남준을 잇는 비디오아티스트로 불리는 박현기 등을 배출하는 등 비디오 영상 플랫폼이 되기도 했다. 내년 4월 13일까지.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