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의 기역(ㄱ)도 모르던 내가 프로 골퍼가 된 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1970년 5월 19일 전남 완도군 완도읍 화홍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고향인 완도는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천혜의 자연을 자랑하는 곳이다. 3남 1녀 중 장남인 나는 어려서부터 부모님 농사일을 도왔다. 부모님은 농사일과 고기잡이 일을 하셨기에 1년 중 쉬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이유도 있지만 두 분은 “모름지기 부지런해야 사람 노릇을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어릴 적 학교를 다녀오면 책가방을 마루에 던지기가 무섭게 밭에서 아버지가 “경주야, 물 보러 가거라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고무 대야를 들고 개펄로 향했다. 하교 후 친구들이 마을 공터에서 공을 차자고 붙잡았지만, 나에겐 아버지의 쟁쟁한 목소리만 들려왔을 뿐이었다.
중학교 시절 아버지를 도와 화홍포 뻘밭에 2m 간격으로 나무 꺾쇠를 박아 덤장그물을 치는 게 내 일이었다. 개펄에 물이 빠질 때가 되면 나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을 털어 담아왔다. 물때가 오기 전 서둘러서 나와야 했기 때문에 고무 대야에 달린 끈을 허리에 동여맨 채 덤장에서 바닷가까지 1㎞ 정도 되는 거리를 빠르게 빠져 나와야 했다. 그렇게 집에 오면 아버지는 또다시 밭에 거둬 놓은 작물을 가져오라고 시키셨다.
집에서는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아들이었지만 친구들과 놀 때는 영락없는 개구쟁이였다. 오봉산 상황봉 자락에서 친구들이 놀자고 부르면 후딱 집안일을 돕고 뛰어가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노는 걸 좋아했던 나는 공부보다 운동에 소질을 보였던 것 같다. 사람들은 내가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나 피나는 노력으로 성공한 촌놈인 줄 안다. 집안이 유복하지는 않았지만 찢어지게 가난하지는 않았다. 미역 양식부터 쌀 녹두 콩 농사를 지었고, 장어 낙지 소라 김 미역 등 다양한 해산물을 먹으며 자랐다. 생활비는 뻘밭에서 잡은 고기를 팔아서 충당했다.
초가집 단칸방에서 생활했던 여섯 식구는 전깃불을 아끼느라 저녁 식사가 마치기 무섭게 소등했다. 카메라가 없어 그 당시를 남긴 가족사진 한 장 없지만 불평불만 하지 않았다. 우리 가족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살았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운동의 세계에 들어가게 됐다. 중학교에 입학하면 등록금을 내야 한다는 소리에 어린 나는 불안해졌다. 아버지에게 현금이 있을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동네 형이 쏠쏠한 정보를 알려줬다. 역도부에 들어가면 등록금을 안 내도 된다는 것이었다. 육성회비 8900원만 내고 학교에 다닐 수 있다니.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 때부터 미리 훈련을 시작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지만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역도를 본격적으로 하다 보니 큰 대회에 나가서 메달을 따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만큼 실력이 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역기를 한 번에 머리 위까지 들어올려야 하는 인상 종목은 하체가 짧고 팔이 긴 내 체형엔 맞지 않았다. “까짓것 하면 되지, 한 번 끝까지 해보자”며 자신을 다독였지만 운동은 의욕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정리=유경진 기자 yk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