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지는 ‘침체의 늪’… 얼어붙은 M&A시장

입력 2024-12-02 19:01 수정 2024-12-02 20:06

“요즘엔 딜비(Deal碑)가 보이지 않네요.”

최근 외국계 투자은행(IB) 관계자들은 서로 이런 말을 건넨다고 한다. IB가 기업 인수·합병(M&A) 거래를 마무리하면 기념으로 책상 위에 작은 기념비를 세우는데, 요새 한국 기업 거래의 딜비를 보기 어렵다는 얘기다. 수년째 이어진 고금리 환경과 경기침체 우려로 국내 M&A 시장이 활기를 잃고 있음을 시사한다. 전문가들은 마땅히 거래할 매물이 없을 정도로 역동성이 떨어진 한국 산업계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진단한다.

2일 국민일보가 하나증권에 의뢰해 집계한 최근 5년간 국내 M&A 동향을 보면 올해 거래 건수는 지난달 19일까지 281건으로 지난해 323건의 87% 수준이다. 국내 M&A 거래는 2019년 616건에서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인 2020년 413건으로 꺾인 뒤 2021년 511건으로 반등했으나 이후 내림세다. 거래 금액도 2019년 55조2100억원에서 올해 35조3900원으로 약 36% 쪼그라들었다.


매각 직전까지 갔다가 업황이 악화하면서 거래가 무산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효성화학의 특수가스 사업부 매각 건이 대표적이다. 효성화학은 지난 7월 IMM프라이빗에쿼티(PE)·스틱인베스트먼트 컨소시엄을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했지만 거래는 최종 무산됐다. 최대 1조3000억원까지 거론됐던 딜이었다. 효성 관계자는 “이 특수가스가 반도체 세척에 사용되는데, 반도체 업황이 좋지 않아 인수 주체 측에선 가격 가치가 줄었다고 판단한 것 같다”며 “가격에 이견이 생겨 최종적으로 협상이 결렬됐다”고 설명했다.

장기간 팔리지 않는 매물도 많다. 국내 1위 중고차 판매 업체 ‘케이카’는 매물로 나온 지 2년이 다 돼가지만 인수 주체를 찾지 못했다. 고금리 상황이 계속되는 데다 현대자동차가 중고차 시장에 뛰어들면서 케이카의 향후 경쟁력에 의문이 커진 탓이다. 금융권 M&A도 부진하다. 우리금융지주는 최근 증권사와 벤처캐피털(VC) 등을 인수하면서 비은행 포트폴리오 확장에 나섰지만 최근 손태승 전 회장의 친인척 부당대출 사태와 횡령 등 악재를 만나면서 보험사 인수 절차가 중단된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 당국 승인을 받지 못하면 거액의 계약금을 날릴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위축된 M&A 시장이 침체 우려에 빠진 한국 경제를 방증한다고 본다. 향후 경기 전망이 밝아 기업 인수를 통해 초과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판단하에 거래가 진행되는데, 전망이 어둡다 보니 선뜻 투자에 나서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우재준 서울과학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는 “M&A 수요는 전통적인 경기 사이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며 “인수 주체들이 시장점유율 장악이나 수익성 개선 등 전략적인 목표를 놓고 따져봤을 때 한국의 경제 상황이 좋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기업의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지연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기업이 비핵심 사업을 매각하고 신규 미래 사업을 인수해 가치를 높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상황”이라며 “신규 먹거리가 될 산업 역량이 뒷받침되지 않아 전체적인 국가의 경제성장 둔화가 장기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두 차례 연속 인하한 것은 자금조달 측면에서 M&A 시장에 호재다. 다만 우 교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이후 돈이 미국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는 점은 불안 요인”이라며 “경제의 불확실성을 키우는 대외 요소가 모두 제거된 것은 아니다”고 짚었다.

장은현 기자 e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