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쉰을 한 달 앞두고 염색을 했다. 근 10년 동안 내심 반백의 중후함을 즐겼지만 최근 몇 달 새 스스로 노쇠화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염색을 하면 조금이라도 젊어 보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3만원을 추가 지출했다.
찬바람이 불고 인사의 계절이 시작되면서 짐을 싸는 대기업 임원들 얘기가 들린다. 승진과 보직 인사 명단에 이들은 없다. 축하해 줄 명단은 있는데 위로를 받아야 할 퇴직자는 알음알음 소문뿐이다.
이들의 퇴직 이유는 대부분 나이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 그룹은 만 60세, 어디는 만 58세가 마지노선이었다는 얘기가 들린다. 일부는 아쉬움이 담긴 퇴직 인사 메시지를 남기지만 예상치 못한 퇴장에 아무 말도 전하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30여년간 한 기업에만 몸담았던 ‘원클럽맨’들은 그 상처가 더한 듯싶다. 크게 위로가 되진 않겠지만 ‘제2의 인생을 응원한다’는 답을 보낸다.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일자리를 잃은 ‘늙은 실업자’들의 미래는 그리 밝지 않다. 그나마 두둑한 퇴직금을 챙긴 대기업 임원 출신들은 1억원가량의 개인택시 면허를 살 여력이라도 있지만 노후 준비가 안 된 대부분은 당장 먹고살 걱정이 우선이다. 수급연령이 63세인 국민연금을 받으려면 4~5년이나 남았는데, 지역 건강보험 가입자로 전환돼 서울에 집이라도 한 채 있으면 매달 100만원 넘는 ‘건보료 폭탄’을 맞는다. 연금 수급자가 돼도 월평균 연금 수령액은 82만원에 불과하니 대학에 다니는 아이들에겐 학자금 대출을 알아보라고 하는 수밖에 없다.
실제 평균의 한국인들은 넉넉한 노후자금 준비를 하지 못한 상태다. 통계청의 ‘2022년 국민 이전계정’에 따르면 한국인 생애에서 흑자 인생은 33년에 불과했다. 평균 43세에 가장 부유한 흑자 인생을 살지만 이후 흑자 폭은 점차 줄어 61세부터 적자에 재진입해 여생을 보내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런 곤궁한 노년이 기다리고 있는데 수명은 늘어난다. 올해 기준 대한민국 국민의 기대수명은 84.3세다. 기대수명이란 특정 연도 출생자의 평균 생존 연수다. 만 15세 이상 인구 4500만명 중 55~79세 고령층은 1600만명으로 3명 중 1명 이상이다. 이들 고령층이 가장 오래 근무한 일자리를 그만둘 당시 평균연령은 만 52.8세에 불과하다. 쉽게 말해 50세에 은퇴한 뒤 80세까지 살아야 하는 구조다. 은퇴와 사망까지의 일자리 미스매치 기간은 30년이나 되는데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처럼 사회 안전망이 촘촘히 돼 있지 않고, 일본처럼 노인 노동시장이 발달하지 않은 게 현실이다.
자연스럽게 일하거나 일자리를 구하는 고령층은 늘고 있다. 55~79세 연령대 10명 중 7명은 73.3세까지 일하고 싶어한다. 고령층 일자리의 절반은 경비나 식당 서빙 같은 단순 노무나 서비스직이지만 근로희망연령은 매년 올라가는 추세다.
비자발적 은퇴자들의 제2의 인생이 골프와 해외여행을 즐길 정도는 못 되더라도 최소한 호구지책을 고민하지 않도록 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는 데 토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년연장, 연금개혁 등 이를 위한 수단과 방법은 다양하지만 하루 이틀 새 이뤄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업 부담 증가나 세대 갈등 야기 등 앞서 해결해야 할 조건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는 게 정부 몫인데 윤석열정부의 진도는 지지부진하다. 1년째 의료개혁에 발 묶여 있는 꼴을 보니 노동개혁 등 고령화 사회의 해법을 찾을 길은 요원해 보인다. 요즘처럼 ‘유리지갑’으로 20년 넘게 꼬박꼬박 낸 세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 적이 없다.
이성규 산업1부장 zhibag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