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재 목사의 후한 선물] 살룸의 한 달 천하

입력 2024-12-03 03:05

최근 미국 대선의 주요 쟁점 중 하나는 정치적 올바름이었다. 사전적 의미로 ‘다른 사람에 대한 부정적 평가 및 차별을 피하거나 바로잡으려는 사회적 운동’을 뜻한다. 너무나 옳게 보이는 가치인데도 이를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도 이 운동을 둘러싼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과연 이런 정치적 올바름은 진정 올바른 것일까.

열왕기하 15장에 나오는 북이스라엘 왕 살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살룸은 스가랴 왕의 신하이자 친구였다. 그런데 스가랴가 왕위에 오른 지 6개월 만에 살룸이 반역을 일으켰다. 그것도 백성 앞에서 쳐죽였다.(왕하 15:10)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스가랴는 가장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던 여로보암 2세의 아들이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여로보암 치하에서 이스라엘은 겉으로는 화려했지만 그 이면에는 깊은 갈등이 있었다. 당시 부패한 지도자들의 횡포로 사회적 약자들이 고통받고 있었다. 아마도 살룸은 이 누적된 불의를 지적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어려운 건 왕 때문이다! 왕만 바뀌면 모든 게 해결된다.” 정의롭게 보이는 살룸의 명분에 많은 사람이 동조했기에 반역이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살룸 왕조는 한 달 천하로 끝났다. 왕이 된 지 한 달 만에 그 자신도 므나헴에게 쳐죽임을 당했다. 올바른 명분을 내세워 혁명에 성공했는데 유효 기간은 불과 한 달이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살룸에 관한 기록에는 그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나오지 않는다. 거의 유일한 경우다. 무슨 뜻일까. 그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하나님 없는 정의는 강력한 명분일 수 있지만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명분 중 하나는 인권이다. 고귀한 가치지만 현재 주장되는 실체를 따져보면 그것은 결국 ‘내 생각과 감정, 느낌’이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이어도 자신이 여자라고 주장하면, 사회는 여자로 인정하고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틀린 것이고 정치적으로 바로잡아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주관이 객관을 압도했다. 결과는 분열과 갈등이다.

한 성도의 아들은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로 학교생활이 어려웠다. 조금이라도 억울한 일을 당하면 감정 조절이 안돼 수업을 어렵게 했다. 담임선생님은 아이들이 그의 약점을 교묘히 이용해 괴롭힌다는 것을 알았지만, 오히려 아이 부모에게 반 친구들 앞에서 사과하고 이해를 구할 것을 요구했다. 이 성도 처지에서 보면 아들이 약자이고 피해자인데 가해자에게 사과해야 하는 억울한 상황에 부닥친 것이다.

그날 아침이 되었다. 힘든 마음으로 예레미야 21장을 큐티하는데 ‘항복하는 자는 살려주신다’는 말씀이 크게 들렸다. 억울하고 분했지만 항복하는 마음으로 아이들 앞에서 사과했다. 아들의 약함을 고백하며 아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대해주길 아이들에게 부탁했다.

이렇게 말씀대로 순종하니 요동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나아가 그는 자신이 세상 성공만 좇느라 가정에서 남편과 아빠의 자리를 지키지 못했던 잘못을 회개했다. 자신을 양육해 가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이 성도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올바름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옳고 그름으로 심판하지 않으셨다. 독생자를 화목 제물로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구속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억울한 사건 앞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며 싸울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속하신 하나님의 공의를 의지하여 적용해야 한다. 다시 말해 성도가 추구할 올바름은 정치적 올바름이 아니라 ‘구속사적 올바름’이다.

구속사적 올바름은 날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올바름이다. 우리가 이 올바름을 추구할 때 우리 인생은 한 달 천하가 아니라 영원한 나라를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될 것이다. 모든 올바름의 기준이신 우리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대강절 기간에 천국의 소망과 즐거움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원한다.

(우리들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