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싸는 OB… ‘소방수 역할’ 오너가 전면 등판

입력 2024-12-02 01:51
게티이미지뱅크

4대 그룹 주력 계열사에서 30년 넘게 근속한 임원 A씨는 법정 정년인 내년에 퇴직하면 좋겠다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업황과 실적 부진 여파가 연말 인사철을 덮치면서 칼바람을 피할 수 없었다. 회사 인사팀에서 예년과 달리 올해는 인건비 절감을 최우선 순위에 놓고 나이 많은 임원 순으로 대거 내보내겠다는 원칙을 세웠기 때문이다. 다른 4대 그룹의 한 핵심 부서에서는 최고위 경영층을 제외하곤 말 그대로 숙청 바람이 불어닥쳤다. 구원투수 위주로 진용을 다시 짜는 인적 쇄신을 단행해 느슨해진 조직에 긴장을 불어넣으려는 의도로 읽힌다.

1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SK·LG·롯데 등 국내 주요 대기업을 관통하는 올해 연말 인사 키워드는 임원 감축을 통한 비용 옥죄기와 오너십 강화 속 친위대 전진 배치로 요약된다. 실적 악화와 연이은 사고로 분위기가 얼어붙은 포스코그룹은 이달 중순쯤 장인화 회장 체제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물갈이 인사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복합 위기 상황을 맞아 전문경영인 체제에 힘을 빼고, 빠른 의사결정을 위해 오너십을 강화하는 움직임이 뚜렷하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사촌 동생인 최창원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의 주도 아래 대대적인 ‘리밸런싱’ 작업을 강도 높게 진행 중인 SK그룹이 대표적이다. 비주력 계열사를 정리하고 임원을 20% 이상 줄여 재무 구조를 안정화하는 ‘소방수’ 역할을 오너 일가가 직접 맡은 것이다. 롯데그룹은 최고경영자(CEO) 21명을 교체하고 임원 22%를 집으로 보내는 등 창사 이래 최대 규모의 문책성 인사를 하면서도 신동빈 회장의 장남, 신유열 전무를 부사장으로 올리며 오너 3세 경영을 가속하겠다는 신호를 줬다. HD현대에서는 올해 수석부회장으로 승진한 정기선 수석부회장이 내년부터 다방면에서 그립을 더 세게 쥘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오너 경영을 뒷받침할 ‘믿을 사람’ 중용 기조도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일각에서는 ‘회전문 인사’라는 비판이 나오지만 삼성에서는 삼성글로벌리서치 내에 신설한 경영진단실과 사업지원태스크포스(TF), 반도체(DS)부문 경영전략담당을 모두 옛 미래전략실 출신이 맡아 그룹 전반의 위기관리(리스크 매니지먼트) 선봉에 나선다. GS그룹에서는 LG에서 분리 독립한 이후 20여년 동안 오너가를 지원한 조력자, 홍순기 GS 사장이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미래 성장 동력 투자 의지가 엿보이는 인사도 있었다. LG그룹은 승진 임원 수는 줄였지만 인공지능(AI)·바이오·클린테크(ABC 분야)에서만 전체 신규 임원의 23%인 28명을 발탁했다. 통신사 LG유플러스는 통신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황현식 사장 대신 ‘전략통’ 홍범식 사장을 앉혔다. 기존 통신 사업만으로는 성장에 한계를 느끼고 AI 등 신사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홍 사장은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영입한 인물로, 인수·합병 등 신사업 발굴을 진두지휘했다.

김혜원 김지훈 기자 ki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