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정치적 목적에서 꺼내든 ‘개헌’… 정쟁에 흐지부지

입력 2024-11-30 02:38
게티이미지뱅크

야권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 단축을 전제로 한 개헌 주장이 공공연히 나오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야당 의원 30여명으로 구성된 ‘대통령 파면 국민투표 개헌연대’도 최근 활동을 시작했다. 대통령 4년 중임제와 결선투표제를 도입하고, 헌법 부칙도 개정해 윤 대통령의 임기를 내년 5월까지로 2년 단축하자는 게 골자다.

정치권에서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론이 제기된 건 오래된 일이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의 원포인트 개헌 제안 이후 정권마다 4년 중임제 개헌 논의가 불거졌지만 그때마다 상대 당의 반발이나 무관심에 사그라들었다. 개헌 논의를 정치적 유불리를 따지며 ‘정략적’으로 접근한 탓도 있었다. 이번 야당발(發) 개헌론은 여야 대립이 극단으로 치닫는 정치 상황과 맞물려 과거보다 더 합의점을 찾기 어려울 것으로 관측된다.

다만 정치권 안팎에서 그동안 ‘1987년 체제’로 불리는 현행 대통령 5년 단임제를 바꿀 때가 됐다는 공감대도 적지 않다. 정치권이 개헌 문제에 정치공학적 접근 대신 민주주의 시스템 전반에 대한 개선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주문이 나오는 이유다.

앞서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는 지난 5월 대통령 4년 중임제 등을 담은 개헌을 2026년 지방선거 전에 마무리하고 지방선거와 대선을 같이 치르자는 제안을 내놨다. 우원식 국회의장과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도 22대 국회에서 개헌을 처리하자는 입장을 냈다. 저마다 주장하는 각론에는 일부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윤 대통령의 임기를 1~2년 단축하자는 내용이 담겼다.


특히 야당은 이번 개헌 추진이 윤 대통령 임기 단축을 위한 방편이라는 점도 감추지 않는 모습이다. 장경태 민주당 의원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탄핵은 징계 절차고 개헌은 입법 절차”라며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여당 의원들이 탄핵열차보다는 개헌열차에 탑승하기 훨씬 쉬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탄핵 트라우마’가 있는 여당 의원들에 대한 포섭 전략임을 내비친 것이다. 개헌안과 탄핵안 모두 국회 의결정족수는 재적 3분의 2(200명) 이상이지만 국회를 통과해도 헌법재판소 심판을 거쳐야 하는 탄핵과 달리 개헌은 국민투표만 거치면 된다.

하지만 야권의 구상대로 개헌 논의가 흘러갈 가능성은 현재로선 높지 않다. 이는 과거 정치권의 개헌 논의 사례를 보면 조금 더 분명해진다. 4년 중임제 개헌을 처음 제안한 건 노무현 대통령이다. 노 대통령은 임기 5년 차인 2007년 1월 ‘4년 중임제’ 원포인트 개헌 방안을 꺼냈다. 그러나 야당 반응은 냉랭했다.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대표는 노 대통령의 개헌 제안을 정략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까지 공격했다. 노 대통령이 지지율 부진과 여당과의 갈등 등 정치적 어려움을 개헌으로 돌파하려 한다고 본 것이다.

그랬던 박근혜 대통령도 임기 4년 차인 2016년 10월 국회 시정연설에서 개헌 논의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곧이어 탄핵 정국에 돌입하면서 개헌 논의 역시 사라졌다. 이번엔 야당인 민주당이 박 대통령의 개헌 제안을 ‘최순실(최서원씨 개명 전 이름) 게이트’를 덮으려는 꼼수라고 취급했다. 이에 앞서 이명박 대통령도 4년 중임제 개헌을 여당인 한나라당에 추진하라고 지시했지만 당내 친박(친박근혜)계 반대로 무산됐고, 집권 2년 차인 2018년 개헌안을 직접 제출했던 문재인 대통령도 국회의 총리 선출권을 둘러싼 야당과의 이견을 끝내 좁히지 못했다.

이처럼 여태껏 개헌 논의는 여야 정쟁과 계파 갈등 속에서 진지하게 다뤄지지 못했다. 지금도 야권 주도 개헌 논의를 두고 여당은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사법리스크를 희석하려는 카드로 본다.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지난 11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민주당이) 이 대표의 1심 선고가 임박하자 한 손에는 특검법, 다른 한 손에는 임기 단축 개헌을 들고 날뛰고 있다”고 비판했다.

야권이 개헌안에 넣겠다는 윤 대통령 임기 단축이 헌법 위배라는 지적도 나온다. 헌법 128조 2항은 ‘대통령의 임기 연장 또는 중임 변경을 위한 개헌은 그 개헌 제안 당시의 대통령에 대해서는 효력이 없다’고 돼 있다. 야당은 해당 조항이 임기 단축에 대해서는 명문화하지 않아 현직 대통령의 임기 단축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법조계 등에서는 “조문의 취지가 현직 대통령의 임기 불안정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며 현직 대통령의 임기는 개헌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반론을 제기한다. 이미 임기가 시작된 대통령에 대해 임기단축을 적용하는 게 헌법상 원칙인 소급입법 금지에 위배된다는 지적도 있다.

정치적 목적의 개헌 추진으로 ‘87년 체제’ 개선에 대한 건설적 논의마저 묻힐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양승함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는 29일 “지금 야권의 개헌 논의는 정치투쟁에 개헌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양 교수는 “대통령 5년 단임제에서는 국가 운영의 장기계획을 세우는 대신 임기 내 성과에 집착하는 등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4년 중임제 개헌 필요가 있다”며 “차분하게 시간을 갖고 공청회 등을 거쳐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여당 의원은 “임기 내내 여소야대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윤 대통령이 개헌을 한다면 역대 어느 정권도 못 해낸 성과가 될 것”이라며 “야당이 임기 단축 같은 무리한 요구를 거두면 개헌 논의를 못 할 것도 없다”고 말했다.

이종선 정우진 기자 rememb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