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눈 쌓인 지붕마다 커다란 백설기 한 채

입력 2024-11-29 00:31

며칠 전 첫눈 예보가 있었다. 새끼손톱에 물들인 봉숭아 물도 거의 다 빠졌다.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솜이불을 코끝까지 바짝 당겨 덮었다. 귀 끝이 차가워진 고양이가 품 안으로 쏙 들어왔다. 고양이 뱃살을 주무르며 생각했다. ‘내일 첫눈이 올까.’

누군가는 어깨에 쌓인 눈을 털며 새벽일을 나가야 할 것이다. 또 누군가는 길에서 살아가는 생명을 위해 따뜻한 물그릇을 내놓을 것이다. 눈길 위에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이들에게 첫눈이 어찌 천진한 낭만이 되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한 번쯤 첫눈의 아름다움에 홀리는 순간이 온다. 나 역시 세상 모든 현란한 색과 소음을 빨아들인 듯한 순백의 평원, 그 평원이 내면에 입체 카드처럼 고요히 일어서는 순간을 사랑한다.

새벽에 절로 눈이 떠졌다. 날이 포근했다. 베란다 문을 열고 보니 회남색 어둠 속에 목화솜을 뿌린 듯 함박눈이 내렸다. 맵찬 바람에 몇 점 흩날리다 마는 싸락눈이 아니라, 비에 섞여 눈인지 비인지 헷갈리는 첫눈이 아니라, 그야말로 푸지게 함박눈이 온 것이다.

“눈 쌓인/ 지붕마다// 커다란/ 백설기 한 채.” 나의 졸시 ‘대설’에서 묘사한 바와 같이 지붕마다 커다란 백설기를 한 채씩 올려놓은 것 같았다. 함박눈은 이내 쌀가루 같은 눈으로 바뀌었다. 눈이 쉬이 그치지 않을 성싶었다. 고양이 밥을 주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이 되자 빗자루를 들고 내려갔다. 바지런한 누군가 이미 비질을 해놓았는데, 그 위로 눈이 쌓였다.

어릴 적에 아버지가 골목길을 시원하고도 힘 있게 비질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나도 플라스틱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 손에 익지 않아, 비질이 잘되지 않았다. 꼭 물 먹은 솜이불을 미는 것처럼 눈더미가 무겁게 느껴졌다. 30여분간 비질하다 보니 제법 열이 났다. 탁, 탁! 운동화에 붙은 눈을 털며, 현관문을 열었다. 어느 결에 붙었는지, 노란 은행잎이 같이 딸려 들어왔다.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