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조선의 문화적 자산
보존했던 전형필… 막대한
재산 공공의 보배로 승화시켜
보존했던 전형필… 막대한
재산 공공의 보배로 승화시켜
하루하루가 복잡하게 돌아가는 가운데서도 지난 9월 3일 새로 문을 연 대구간송미술관 소식은 영남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에 은은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 미술관은 개관을 기념해 간송 전형필(1906~1962)이 수집한 국보와 보물 특별전을 열었다.
개관 72일 만에 관람객 20만명을 돌파할 만큼 높은 관심을 받은 특별전의 제목 ‘여세동보(與世同寶)’는 ‘세상과 더불어 보배를 나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문구는 1938년 간송미술관의 전신인 보화각 개관 당시 위창 오세창이 남긴 글에서 유래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 전래의 희귀한 문화유산을 수집해 설립한 사설 미술관의 존재 의의를 집약한 이 표현은 지금도 깊은 울림을 준다.
주말 예약은 이미 꽉 찼기에 주중에 어렵게 예약을 하고 도착하니 평일 오후인데도 미술관은 기대감과 호기심 어린 표정을 한 사람들로 붐볐다. 남녀노소를 아우르는 다양한 관람객의 모습은 이 전시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넓은 공감을 일으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간송이 살아간 시대는 일본의 식민 통치 아래 놓여 있던 때였다. 그는 개인재산을 털어 예술품과 문화재를 사들였고, 그것을 보관하기 위한 공간으로 보화각을 세웠다. 그의 문화유산 수집은 단지 개인적 취향이나 미적 감수성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다. 강압적 식민 지배 아래에서 조선 민족의 문화적 자산을 보존하기 위한 행위였기에 일종의 저항적 실천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예술품의 소유가 아닌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간송은 대지주의 후손으로 태어나 거대한 재산을 상속받았다. 당시 대지주 가문의 다수는 식민 당국과 협력하거나 사적인 부를 극대화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간송은 그 재산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했다. 그는 예술작품, 서책, 도자기, 불상 등을 수집하는 데 거금을 쏟아부었다. 긴 시간을 관통하며 보존될 수 있는 문화적 유산을 지켜내고자 했다.
간송은 문화유산을 사들일 때 주저 없이 천문학적인 돈을 지불한 것으로 유명하다. 1935년 ‘훈민정음해례본’의 존재를 알게 된 그는 서울의 고급주택 한 채를 살 수 있는 거액을 지불하고 이를 손에 넣었다. 많은 사람은 그의 행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간송에게 그것은 단순히 책 한 권을 사들이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 책을 자신이 ‘소유할 수 없는 것’으로 느꼈다고 한다. 법적으로는 그의 소유였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지키고 물려줘야 할 ‘수탁물’로 인식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간송은 생전에 자신이 수집한 문화유산을 대중과 쉽게 공유하지 못했다. 보화각은 사설 미술관으로,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공간이었다. 식민지 시기는 물론이고 광복 후에도 ‘여세동보’의 철학은 일부 애호가에게만 제한적으로 실현됐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간송이 죽은 후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의 유산이 진정으로 세상과 나누어졌다는 사실이다. 정치적, 문화적 민주주의가 확산하면서 간송이 남긴 유산은 오늘날 일반 대중도 접근할 수 있는 공공의 ‘보배’가 됐다.
많은 사람은 부의 축적을 성공의 척도로 본다. 그러나 ‘얼마나 소유하고 있는가’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면 돈은 한없이 무겁게 인간을 짓누른다. 심지어 무엇을 위한 소유인지조차 망각하고 그 무게에 짓눌린 채 살아가기도 한다. 간송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돈의 무게가 달라질 수 있고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부가 아니라 우리가 소유한 것의 의미를 바라보는 철학일지도 모른다. 돈을 쓰는 방식은 곧 그 사람의 삶을 드러낸다. 간송이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국보와 보물에 쏟아부은 것은 그 자체로 그의 철학이자 시대를 읽는 실천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시대를 초월해 그의 보배를 함께 나눌 수 있다. 대덕산 자락의 아름다운 미술관을 뒤로하며, 부는 삶의 목적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 묻는 도구일 뿐임을 새삼 깨닫는다.
허영란(울산대 교수·역사문화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