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역폭메모리(HBM) 후발주자로 전락하며 자존심을 구겼던 삼성전자가 사장단 인사로 대대적 쇄신에 나섰다. 반도체(DS) 부문장인 전영현 부회장을 대표이사로 내정하고 메모리사업부장을 겸임토록 하면서 메모리 주도권 탈환에 나섰다는 평가다. 적자를 거듭하고 있는 파운드리사업부장도 전격 교체했다. ‘3톱’으로 꼽히는 한종희·전영현·정현호 부회장은 모두 유임시키며 큰 틀에서의 경영 안정성도 유지했다. 새로운 인물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기존 영역에서 노하우를 가진 인사들을 중용해 단기간에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는 게 재계의 평가다.
삼성전자는 27일 DS부문에서 메모리사업부와 파운드리사업부 수장을 교체하는 등 정기 사장단 인사를 발표했다. 가장 큰 변화는 HBM 사업에서 실기했던 메모리사업부가 대표이사 직할 체제로 전환된 것이다. 지난 5월 반도체 위기 극복을 위해 DS부문장으로 투입된 전 부회장이 메모리사업부장을 겸하면서 반도체 기술력 회복에 속도를 내게 됐다. 삼성전자는 여전히 최대 고객사인 엔비디아에 5세대 HBM(HBM3E)을 공급하지 못하고 있다.
침체를 거듭했던 파운드리사업부는 기술력과 네트워크를 겸비한 사장 2명을 배치했다. 파운드리사업부장에 오른 한진만 사장은 미국에서 DS부문 미주 총괄 부사장에서 승진해 파운드리를 총괄한다. 파운드리사업부 내 신설된 최고기술책임자(CTO)에는 남석우 사장이 임명됐다. 남 사장은 반도체 공정 개발과 제조 전문가로 반도체연구소에서 메모리 전 제품 공정개발을 주도했다. 글로벌 1위인 대만 TSMC와의 격차를 줄여야 하는 중차대한 과제를 안고 있는 파운드리사업부의 구원투수 역할을 할 전망이다. 박용인 시스템LSI사업부장은 유임됐다.
경영 전략을 담당하는 DS부문 직속의 사장급 조직도 신설됐다. 경영전략담당에 오른 김용관 사장은 사업지원TF 부사장에서 승진하며 반도체 경쟁력 회복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게 됐다. 김 사장은 반도체 기획·재무 업무를 거쳐 미래전략실 전략팀, 경영진단팀 등을 경험한 전략기획 전문가로 평가된다. DS부문 직속으로 사장급 경영전략 담당 보직을 신설한 것은 기술 전문가와 경영전략 전문가를 병렬 배치해 반도체 체질 개선에 나서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디바이스경험(DX) 부문은 한종희 부회장과 노태문 사장 등 주요 사업부장이 유임되며 변화보다는 안정을 택했다. 갤럭시 버즈3 불량 등 품질 논란을 빚은 데 대한 대책으로는 품질혁신위원회가 신설됐다. 한 부회장이 품질혁신위원장과 DX부문장, 생활가전(DA)사업부장을 겸임한다. 글로벌마케팅실장 자리에는 이영희 사장이 물러나고 이원진 사장이 복귀했다. 이 사장은 구글 출신 광고·서비스 비즈니스 전문가로, 지난해 말 모바일경험(MX)사업부 서비스비즈팀장에서 물러난 이후 1년 만에 경영 일선으로 돌아왔다.
경계현 사장이 맡았던 미래사업기획단장은 고한승 삼성바이오에피스 대표이사 사장이 새롭게 맡는다. 그는 2008년 그룹 신사업팀과 바이오사업팀에서 현재의 삼성바이오에피스를 만들어낸 창립 멤버다. 13년 동안 대표이사로 재임하며 사업을 성장시킨 베테랑 경영자로 평가받는 만큼 이번 인사에서 삼성의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는 중책을 맡게 됐다.
사업지원TF는 사장급이 충원되며 삼성그룹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강화했다. 박학규 DX부문 경영지원실장이 사업지원TF 담당 사장으로 이동하며 그룹의 경영전략 전반을 설계하는 중책을 수행하게 됐다. 삼성 인사의 최대 관심사였던 정현호 사업지원TF장(부회장)은 유임되며 2017년 11월 이후 7년 넘게 자리를 지키게 됐다. 사업지원TF가 내년 2월 이재용 회장의 2심 판결 이후 과거 미래전략실과 같은 상설 조직으로 개편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삼성전자는 “경영 역량이 입증된 베테랑 사장에게 신사업 발굴 과제를 부여하는 등 쇄신 인사를 단행했다”며 “글로벌 리더십과 우수한 경영 역량이 입증된 시니어 사장들에게 브랜드·소비자 경험 혁신 등의 도전 과제를 부여해 회사의 중장기 가치 제고에 주력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심희정 전성필 기자 simci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