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고준위법은 ‘지금’ 필요하다

입력 2024-11-28 00:34 수정 2024-12-01 16:20

극지방 하늘에서 반짝이는 오로라부터 야광시계 눈금을 보여주는 발광체까지 우리 주변의 방사선은 ‘생활’이다. 이처럼 방사선은 자연 현상으로 의미를 갖기도 하지만 풍요로운 삶에 일조하는 인위적 기술로도 힘을 발한다. 원자력발전소도 그중 하나다. 한국은 1978년 원전을 가동하며 첫발을 디뎠다. 모든 국민과 산업이 풍족하게 전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된 데는 원전의 역할이 작지 않다. 다만 이와 함께 방사성폐기물(방폐물)이라는 달갑지 않은 부산물도 얻게 됐다.

원전을 가동하면 필수적으로 사용후핵연료와 같은 방폐물이 만들어진다. 비단 원전뿐 아니라 방사선을 활용하는 모든 분야에서 방폐물은 생성된다. 일례로 우리가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는 병원에서도 방폐물이 나온다. 정부는 이 다양한 방폐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5년 ‘방폐물유치지역법’을, 2008년에는 ‘방사성폐기물관리법’을 제정했다. 해당 법에 근거해 추진한 중저준위 방폐장이 2015년 준공되면서 일단 중저준위 방폐물에 대한 고민은 일단락됐다.

그럼에도 숙제가 남았다. 한국은 원전 5대 강국이면서도 유독 사용후핵연료 같은 고준위 방폐물 처리 방안에서는 지각생 신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30년이면 한빛원전 사용후핵연료 보관 시설이 포화돼 가동을 멈출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하면서도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는 멈춰 있다.

최근 외국을 여행하는 TV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유럽의 모습과 정반대다. 파리 근교 노장쉬르센에 있는 원전과 핀란드 올킬루오토의 원전 그리고 온칼로 고준위 방폐물 처분장이 있는 마을이 TV 화면에 소개된 바 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해당 시설은 충분히 안전하고 얻는 이득이 많다고 말하면서 자부심까지 가지고 있었던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한국의 모습은 TV 속 다른 원전 강국 주민들과 대비된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출발점 설정이 시급하다. 출발점은 원칙과 기준을 담은 관련 법률 제정이 돼야 할 것이다. 중저준위 방폐장의 민주적인 부지 선정과 성공적인 운영에서 보듯 법률 제정은 결과로 이어진다.

이는 국회가 풀어내야 할 당면한 숙제이기도 하다. 지난 5월 종료된 21대 국회는 4건의 고준위 방폐물 관련 법안을 처리하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국민의 90% 이상이 고준위 방폐물 처분 시설 필요성을 말하는데도 해법을 내놓지 못한 것이다. 22대 국회 들어 여야는 모두 5건의 고준위 방폐물 관련 법률안을 발의한 상태다. 이번만큼은 21대 국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한다.

전 세계 최초로 고준위 방폐물 처분 시설 건설을 마치고 내년 가동을 앞둔 핀란드나 이미 부지 선정을 완료한 스위스, 프랑스 등 참고할 만한 사례는 차고 넘친다. 원전을 운영 중인 주요 국가 가운데 고준위 방폐장 관련법이 없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무이하다. 22대 국회의원들의 상식을 기대한다.

이희석 대한방사선방어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