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판화에서 민중미술까지… 한국 판화 ‘오디세이’

입력 2024-11-27 04:13 수정 2024-11-27 04:13

1936년에 태어난 한국 작가 김구림과 미국 작가 프랭크 스텔라의 에칭(동판화)이 전시장에 나란히 걸려 있다. 제작 시기도 각각 1979년과 1984년으로 비슷하다.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이 하는 기획전시 ‘판화 오디세이’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을 꼽으라면 이것이 아닐까. 김구림은 한국의 70년대 실험미술 대가이며 청계천 입구에 조각이 있는 프랭크 스텔라는 ‘소프트 조각’으로 불리는 팝아트의 대표 작가 아닌가. 그들은 한창나이인 40대 무렵 판화에 푹 빠져 있었던 것이다.

김진하 나무아트 대표는 25일 “1968년 한국현대판화가협회가 생기면서 한국에서 본격적인 판화시대가 전개됐다”면서 “이에 따라 전통적인 방식의 목판화 외에 동판화, 실크스크린, 석판화 등 다양한 제작 기법의 현대 판화가 나왔다”고 말했다. 이들 판화는 프레스기를 가지고 제작하기에 당시로서는 첨단 매체였다. 한국의 김구림도, 미국의 프랭크 스텔라도 첨단 매체로서의 판화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당시는 회화 작가들이 새로운 장르 실험을 하기 위해 판화를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가운데 ‘칼노래’로 널리 알려진 오윤이 대표하는 80년대 목판화는 민중미술 형식으로서 새롭게 탄생했다. 이어 90년대 미술대학에 판화과가 생겨나면서 회화와 판화의 구분과 위계가 생겨나고 회화 전공은 판화를 멀리하는 현상도 생겨났다.

이번 전시는 조선시대 목판 등 유물을 통해 다량 생산 기법으로서의 판화 역사를 조명하는 것으로 전시를 연다. 이어 현대 판화의 표현미를 자연, 인물과 동물, 일상, 추상 등 주제별로 나눠 살펴본다.

‘무호도’ 등 오윤의 목판화 대표작을 만날 수 있고, 판화가 시장성을 잃어감에도 목판화를 우직하게 밀어가며 대형 작업을 개척한 김준권, 김억 등 민중미술 작가들의 작품도 눈길을 끈다. 한국에서 70~80년대 전개된 추상 판화는 ‘판화=민중미술’에 갇힌 우리의 시선을 확장시켜 준다.

이번 전시에서는 판화가 갖는 복제성에 주목해 사진 프린트 등으로 판화의 개념을 확장시켰다. 1세대 원로부터 판화의 개념을 다양한 매체로 확장한 MZ 작가까지, 또 아니쉬 카푸어, 알렉스 카츠 등 유명 외국 작가들까지 초청해 그야말로 판화 잔치를 벌였다. 1월 5일까지.

손영옥 미술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