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문화] 샤갈처럼 혹은 뭉크처럼 심각한 주제 무겁지 않게 판화에 새겨진 초현실주의

입력 2024-11-27 04:05
이란 출신 미국 작가 니키 노주미가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삼청로 바라캇컨템포러리 갤러리에서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작가 뒤편 작품은 딸을 모델로 한 ‘자는 사라’(종이에 모노타이프, 162×111.5㎝, 1981). 손영옥 기자

미국 뉴욕에서 활동 중이던 니키 노주미(83)는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이란 혁명 이듬해인 1980년 고국 이란에 머물고 있었다. 테헤란의 현대미술관이 이란 혁명을 기념하고자 기획한 전시에 초청받아서다. 한데 작품들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팔레비 왕조에 비판적이었지만, 동시에 호메이니를 최고지도자로 한 이슬람 혁명 정권의 독재에 대해서도 비판의 칼날을 겨누었기 때문이다. 관제 언론은 노주미의 작품 세계에 대해 이슬람 혁명군을 깎아내리는 등 ‘대단히 저속한’ 작품이라고 공격했다. 이에 일부 작품을 내렸지만 논란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급기야 분노한 군중이 미술관으로 쳐들어오는 사태가 벌어졌다. 생명에 위협을 느낀 노주미는 쫓기듯 미국으로 피신해 망명 작가의 삶을 살게 됐다.

이란 출신의 미국 작가 니키 노주미 개인전 ‘누군가 꽃을 들고 온다’가 서울 종로구 삼청로 바라캇컨템포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한국에서의 개인전은 2018년 이후 두 번째다. 전시 개막에 맞춰 방한한 작가를 최근 전시장에서 만났다.

‘푸른 말’(종이에 모노타이프, 각 판넬 이미지 162.5×111.5㎝, 1981). 바라캇컨템포러리 갤러리 제공

6년 전 전시가 작품 세계 전반을 보여줬다면 이번 전시는 특정 시기를 조명한다. 망명 직후인 1981년 아내와 딸 등 가족과 함께 마이애미에서 머물던 때다. 그 1년여 동안 작가는 모노타이프를 집중적으로 제작했다. 모노타이프는 판화의 일종인데, 금속판 혹은 석판 위에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 뒤, 물감이 마르기 전에 재빠르게 찍어내는 기법을 말한다. 판화는 여러 장을 찍어낼 수 있는 복제성을 특성으로 한다. 모노타이프는 판화임에도 딱 한 장만 찍고 붓질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회화적 성격이 강하다. 그러면서도 프레스기로 눌러 물감의 질감을 없애니 판화적 성격도 있는 독특한 기법이다.

뉴욕타임스는 2020년 그의 작품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시위 예술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 25선”에 뽑았다. 작가는 미국 유학 시절 재미이란학생회(IRA)에 가입해 반정부시위를 주도했고 이후에도 작품을 통해 사회적 발언을 했다. 전시에 나온 모노타이프 60여점은 그런 시위 예술의 맛을 보여준다.

한국에서는 시위 예술로서의 판화하면 오윤의 목판화가 갖는 투박하고 거친 칼맛의 저항 정신이 유일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우리에게 노주미의 모노타이프는 판화로 만든 시위 예술의 새로운 영토를 보여준다. 즉흥적이고 속도감 있는 붓질로 그려야 하는 모노타이프 판화가 내는 초현실적이면서도 시적인 저항의 목소리 말이다.

‘누군가 꽃을 들고 온다’(종이에 모노타이프, 75×53㎝, 1976). 바라캇컨템포러리 갤러리 제공

전시작 중 망명 이전 시도한 표제작 ‘누군가 꽃을 들고 온다’(1976)는 혁명에 대한 희망을 싱징하듯, 비현실적으로 큰 꽃송이를 난장이처럼 작은 여러 사람들이 들고 가는 모습을 담았다. 마이애미 시절에 제작한 작업은 보다 과감하다. 말 한 마리가 화면에 가득 차듯 있고, 그 주위에 목잘린 얼굴이 여기저기 배치돼 있거나, 알라딘의 램프에서나 나올 법한 남자 괴물이 여성을 위협하거나, 손바닥과 새, 사과 등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병치돼 있기도 한다. 호메이니를 연상시키는 인물도 등장하고 이슬람 사회의 엄격한 성적 금기에 도전하는 과감한 장면도 있다. 목 잘린 얼굴은 교수형이 많았던 이슬람 문화의 단면을 보여주는 도상이라고. 그런 얼굴이 화면 속에 둥둥 떠 있거나 사람의 전신이 옆으로 누워 있거나 거꾸로 매달려 있는 등 중력을 거스른다.

그의 작업은 반정부적이면서 반종교적이다. 하지만 그런 주제를 이처럼 정색하고 무겁게 다루기보다는 초현실적으로, 우화적으로 다루다보니 노주미의 작품은 샤갈의 그림처럼 환상적이면서도 동시에 뭉크의 그림처럼 절규가 터져 나온다.

노주미 작가는 “판화를 하던 아내의 동판화 작업을 도와주다 이 기법에 빠졌다”면서 “낙서하듯이 빨리 해내니까 주제의 심각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또 “장난치듯(playful) 작업할 수 있어 좋았다”며 “머릿속에 떠오른 것들을 마구 던지듯이 작업했다. 모노타이프에서는 뭐든 할 수 있었다. 초현실주의, 초초현실주의도 가능했다”고 웃었다. 유화 작업과의 차이점을 묻자 “유화는 조금 무겁고 경직된 느낌이 있다면 모노타이프는 인간적인 면모가 있다”면서 “정치와 시는 함께 가면 좋은 궁합”이라고 강조했다.

전시장에는 망명 이전에 그린 유화 작업도 함께 나와 모노타이프와 비교 감상할 수 있다. 전시는 1월 12일까지.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