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平安)’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뜻풀이는 ‘걱정이나 탈이 없음’입니다. 비슷한 단어로는 안녕(安寧) 안평(安平) 평강(平康) 무사(無事) 무고(無故) 등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용례를 따르자면 평안이란 걱정스러운 일이나 사고가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성경이 가르치는 평안은 조금 성격이 다릅니다. 문제와 사고가 몰려오는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사도행전의 스데반 집사를 통해 그런 평안을 살펴보겠습니다.
스데반은 예루살렘교회가 구제와 섬김의 일을 위해 세운 일곱 집사 중 한 명입니다. 그는 자신처럼 헬라어를 사용하고 로마문화에 익숙한 사람들, 즉 헬라파 유대인에 대해 특별한 애정이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선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안타깝게도 헬라파 유대인 중에는 스데반이 전한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과 스데반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모세의 율법에 대해 옥신각신 의견을 주고받았습니다. 헬라파 유대인은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스데반을 당해 낼 도리가 없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스데반의 가르침에 마음을 열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음모를 꾸밉니다. 거짓 증인들을 매수해 스데반을 산헤드린 공회에 고발합니다. 공회의 재판은 짜인 각본대로 진행됩니다. 거짓 증인들이 모함과 날조로 스데반을 압박합니다. 고발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스데반이 모세 율법을 무시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모독했다는 겁니다.
무지한 대중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립니다. 증오심이 가득한 저주의 말이 입에서 튀어나옵니다. 손에는 돌멩이를 움켜쥐고 금방이라도 던지려 준비합니다. 스데반의 생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습니다. 모든 상황은 스데반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강요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의 표정이 ‘천사의 얼굴’(행 6:15)과 같았다고 기록합니다. 스데반은 어떻게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천사의 얼굴을 하며 평안을 누릴 수 있었을까요. 스데반의 시선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이를 갈며 달려들 준비를 하는 군중의 얼굴에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늘을 주목했고 하나님의 영광을 봤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행7:55) 그것은 흔치 않은 광경입니다. 신약성경의 다른 본문들(막 16:19; 골 3:1; 히 10:12; 계 20:11 등)은 한결같이 예수님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분’으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본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서서’ 계십니다. 예수님은 앉아 계실 수가 없습니다. 스데반이 집단폭력과 거짓 증언의 희생양이 되는 광경을 그냥 묵과하고 계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벌떡 일어나 ‘서서’ 스데반의 모습을 주목하시며 응원하십니다.
아! 그렇습니다. 스데반은 자신을 향한 위협이나 사건이나 문제를 본 게 아닙니다. 스데반이 본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었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서’ 자기를 응원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그는 하늘을 주목하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임박한 폭력 앞에서도 평안을 유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게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따른다는 것은 뭔가 거창한 것을 목표로 두는 게 아닙니다.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늘 보좌 우편에 ‘서서’ 우리 삶을 응원하시는 예수님을 보는 것, 그렇게 주님을 바라보다가 내 표정 하나하나가 천사의 얼굴이 되고, 나아가 예수님의 얼굴을 닮아가다 예수님의 얼굴처럼 변화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따른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평안의 얼굴을 누리는 우리네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허요환 안산제일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