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도에 이어 또 당했다”… 예견됐던 사도광산발 ‘굴욕’

입력 2024-11-25 00:03 수정 2024-11-25 00:03
이쿠이나 아키코 일본 외무성 정무관이 24일 니가타현 사도섬에서 열린 ‘사도광산 추도식’에서 헌화하고 있다. 일본 정부 대표로 나온 이쿠이나 정무관은 2022년 8월 15일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한 이력이 있어 논란이 제기됐다. 연합뉴스

한국 정부가 결국 ‘보이콧’을 결정한 ‘사도광산 추도식’발(發) 외교 굴욕은 예견된 결과였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일 관계 정상화를 위해 정부는 계기마다 선제적 양보를 해 왔지만, 일본 측은 진정성이 의심되는 대응으로 일관해 왔다는 것이다. 내년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앞두고 과거사 문제가 외교 갈등으로 비화하지 않도록 양국 간 소통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강창일 전 주일대사는 반쪽짜리 추도식이 열린 24일 통화에서 “애초 이런 결과가 나올 거라고 예상됐던 일”이라며 “완전한 외교적 패착”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2015년 군함도의 유네스코 등재 때도 (일본 정부는) 약속을 안 지켰는데, 이마저도 해결하지 못하고 (추도식을) 진행했으니 사기를 당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앞서 일본은 2015년 군함도의 유네스코 등재 당시 희생자를 기리는 정보센터 설치를 약속했으나, 센터를 군함도 인근이 아닌 도쿄에 설치하고 강제성을 부인하는 자료를 전시하는 등 후속 조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이번 일도 그때와 유사하게 진행됐다. 사도광산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인 1200~1500명이 동원돼 강제노역했던 곳으로 지난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일본은 등재 선(先) 조치로 한국인 노동자를 기리기 위한 전시물 설치와 추도식을 제안했고 우리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전시물에 ‘강제’라는 표현이 전혀 등장하지 않았으며 추도식 준비 과정에서도 우리 정부의 요구에 성의 있는 조치를 내놓지 않았다. 이날 진행된 사도광산 추도식에서도 일본 중앙정부 대표로 참석한 이쿠이나 아키코 외무성 정무관은 추도사에서 강제노역이나 강제동원 등 ‘강제’라는 단어를 전혀 입에 올리지 않았다. 지난 7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 당시에는 강제 노역을 언급했었지만, 이번에는 이마저도 빠진 것이다.

일본 정부의 이런 태도는 자국 정치 상황과 여론 지형을 의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는 지난 10월 한·일 역사 인식의 ‘비둘기파’로 분류되는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의 집권으로 과거사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란 기대와 다른 양상이다. 이시바 총리의 당내 정치적 기반이 약한 상황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한국이 먼저 양보하면 일본 측이 화답하리라는 선의에 기댄 외교를 벌이면서 보다 구체적인 ‘액션’을 끌어내기 위한 전략이 부족했던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이기태 세종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우리가 계속 양보했는데 일본이 따라오지 못했다. 일본 측의 호응이 전혀 없었다고 봐야 한다”고 평가했다.

문제는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 취임을 앞둔 중요한 시점에서 양국이 과거사로 삐거덕거리며 다시 관계 악화의 길로 갈 수 있다는 점이다. 주고베 총영사를 지낸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는 “우리 정부도 일본과 협력한다는 노선을 정했기 때문에 쉽게 바꾸지 않을 것”이라며 “외교부을 중심으로 외교력을 발휘하는 대외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말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25일 유족들과 별도 추도식을 여는 것과 관련해 “과거사는 일본 측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우리 정부의 확고한 의지 표현”이라며 “이런 원칙을 바탕으로 한·일 모두의 이익에 부합하는 양국 관계 발전을 위해 계속 노력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박준상 기자 junwit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