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로사 부르는 ‘밤샘 로켓배송’… “아들의 죽음 진상 밝혀주길”

입력 2024-11-26 00:47
택배노동자 고 정슬기님과 함께하는 기독교와 시민사회 대책위원회가 지난 9월 24일 서울 송파구 잠실에 위치한 쿠팡 본사 앞에서 출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참가자들은 ‘쿠팡은 죽음을 부르는 로켓배송을 중단하라’는 내용의 플래카드를 들고 노동자들의 안전과 권리를 보장하라고 촉구했다.

“제 아들 슬기는 쿠팡 로켓배송 기사로 1년 2개월간 일하다 지난 5월 과로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겨우 41세였고 아내와 네 자녀를 남겼습니다. 첫째 아이는 주변에서 ‘네 아빠가 로켓배송 연료가 됐다’는 말을 듣는다고 합니다.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며느리와 손주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최근 영등포선교회에서 만난 정금석(69) 장로는 아들을 잃은 슬픔을 억누르며 담담히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슬기는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초등학교 때부터 교회 반주를 맡고 대학에서 실용음악을 전공했다”며 “결혼 후 네 아이를 위해 택배 일을 시작했지만 선교지에 있는 우리를 안심시키려 항상 밝게 부모님 건강을 챙기던 속 깊은 아들이었다”고 회상했다.

정 장로는 방글라데시에서 10년째 사역 중인 평신도 선교사다. 수도 다카에서 약 250㎞ 떨어진 시골 마을에서 유치원과 초등학교 과정을 가르치며 어린이들을 위해 사역 중이던 그는 지난 5월 아들 정슬기씨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했다.

그는 “아들의 비보를 듣고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수없이 하나님께 ‘왜 이런 고난을 주시는 겁니까’라고 물었지만 아직 답을 얻지 못했다”며 “장례를 마친 후 아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과 깊은 슬픔 속에서 한 달간 애도의 시간을 보냈다”고 덧붙였다.

그를 다시 일어서게 한 것은 남편과 아버지를 잃고 살아가야 할 며느리와 네 손주들이었다. 정 장로는 “아들의 몫까지 살아가며 진실을 밝히겠다”며 행동에 나섰다.

안전한 노동환경 마련해야
정슬기씨 생전 모습. 유가족 제공

슬기씨는 쿠팡의 배송 전문 자회사인 쿠팡로지스틱스서비스(CLS) 남양주2캠프 굿로지스대리점에서 퀵플렉스 근로자로 일했다. 퀵플렉스는 1톤 트럭을 보유하고 배송 건당 수수료를 받는 특수고용직으로 쿠팡의 간접고용 형태의 배송기사다.

고인은 매일 오후 8시30분부터 다음 날 오전 7시까지 주 6일, 평균 63시간을 근무했다. 야간 할증을 적용하면 주 평균 노동시간은 77시간에 이르며 산재 기준인 주 60시간을 크게 초과했다. 한 달에 고작 4일만 쉬며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고 체중은 10kg 감소했다.

하루 배송 물품량은 250개였으나 숨지기 50일 전 배송구역 변경으로 340개로 급증했다. 정씨는 일반 기사들이 하루 1회전 배송을 하는 것과 달리 남양주 캠프와 중랑구를 3번 오가며 하루 100㎞를 이동하는 배송을 이어갔다.

한국통합물류협회에 따르면 쿠팡 CLS의 시장 점유율은 2022년 12.7%에서 지난해 8월 24.1%로 급등하며 물류업계 2위로 성장했다. 그러나 로켓배송의 편리함 이면에는 과도한 노동과 압박을 견뎌야 하는 택배 기사들의 고통이 있다. 기사들은 주문 후 다음 날 오전 7시까지 배송을 완료해야 하며, 이를 못 지킬 경우 영업점 계약 해지나 구역 회수(클렌징 제도)등 지속적인 압박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

정 장로는 “아들이 인권과 생명이 경시되는 환경에서 일했다는 사실에 절망했다”며 “2020년부터 올해 8월까지 20명이 사망했지만 쿠팡은 사과 없이 책임을 회피하고 ‘일하기 좋은 기업’이라는 거짓 광고를 이어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비극 반복되지 않도록 ‘청문회’ 촉구

지난 9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센터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영등포산업선교회를 포함한 9개 단체와 시민사회 단체 14곳이 함께 서울 잠실 쿠팡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쿠팡 노동자 정슬기님을 지지하는 기독교 및 시민사회 대책위원회’를 출범했다.

대책위는 지난 10일 정씨의 과로사가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산업재해로 인정됐다고 밝혔다. 공단은 정씨의 심근경색 의증이 쿠팡CLS 업무와 관련이 있다고 판단했다. 대책위는 “이번 산재 인정을 통해 쿠팡의 로켓배송 시스템이 과로사를 유발했음을 시사한다”며 유족에 대한 사과와 재발 방지책 마련을 촉구했다.

공교롭게도 이날 정종철 쿠팡풀필먼트서비스 대표와 홍용준 쿠팡CLS 대표가 국정감사에 출석했다. 홍 대표는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고인과 유가족에게 사과했지만, 사실상 해고제도로 불리는 배송 구역 회수제도(클렌징) 폐지에는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정 장로는 쿠팡의 책임을 규명하고 노동 현장의 실질적 변화를 이끌기 위해 지난달 10일 쿠팡에서 숨진 노동자 3명의 유가족들과 함께 국민동의 청원을 발의했다. 이 청원은 이달 7일 5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 청문회 개최 요건을 충족했다.

그러나 청문회 개최 논의는 여전히 국회에서 답보 상태에 있다. 정 장로와 대책위는 “진정성 있는 사과와 재발 방지책이 마련될 수 있도록 조속히 청문회를 열어 꼭 진상을 밝혀 주시길 바란다”고 촉구했다.

정 장로는 자식을 잃은 슬픔 속에서 하루 두 끼만으로 근신하며 지내고 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치유와 회복’이라는 위로와 소망으로 다가오셨다. 정 장로는 위로에 힘입어 매서운 추위에도 더 이상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매주 쿠팡 본사 앞에서 1인 시위와 촛불집회에 나서고 있다.

“슬기야, 아빠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하나님 곁에서 날마다 가족들 위해 기도해 줘. 아빠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소중한 생명들이 더는 헛되이 희생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죽기까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다 갈 테니 천국에서 만나자. 사랑한다.”

글·사진=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