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365-11월 23일] 복음은 용서를 통해 나타난다

입력 2024-11-23 03:10

찬송 : ‘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 218장(통369)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마태복음 18장 21~35절


말씀 : 복음의 은혜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우리를 통해 역사할 때, 특히 우리가 맺는 관계 속에서 용서를 통해 복음의 능력은 나타납니다. 용서가 어려운 이유는 용서에 대한 성경적 개념이 정립되지 않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뉴욕 리디머 교회를 섬겼던 팀 켈러 목사는 자신의 저서 ‘용서를 배우다’에서 용서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말합니다.

첫째는 ‘값싼 은혜’입니다. 무조건적인 용서를 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누군가 폭행을 했는데 용서를 하고, 또 폭행하고 용서를 하고 또 폭행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 용서는 정의를 상실한 힘없는 용서가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은혜 없는 용서’입니다. 이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용서가 아닌 정의를 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가해자를 반드시 응징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세 번째는 ‘인색한 은혜’ 즉 거래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용서입니다. 사과하면 용서해주겠다는 주장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할 때도 회개하면 용서를 하지만 회개를 하지 않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겠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적 용서의 출발은 먼저 수직적 차원의 용서입니다.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용서는 출발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1만 달란트 빚진 자가 탕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지 못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받은 용서가 얼마나 큰지에 대한 인식의 부족에서 나오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으로부터 용서’라는 말은 하나님의 용서를 자신의 내면에 깊이 새기는 과정을 말합니다. 그래서 타인을 향한 용서의 출발은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는 수직적 차원의 용서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하는 내면적 차원의 용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타인을 향한 수평적 차원의 용서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용서는 사랑과 정의를 모두 추구합니다. 사랑의 하나님만 강조하는 사람은 응석받이처럼 살아가고, 진노의 하나님만 믿는 사람들은 학대당한 아이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단순히 모든 것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하나님의 주신 영혼으로 보고 상대방 안에 있는 죄의 권세가 파괴되기를 원하기에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해줄 수도 있어야 합니다. 용서하지만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정의를 행하는 것도 이웃사랑입니다. 가해자들이 그들의 마음속에서 활동하는 악에서 해방되기를 바랄 정도로 그들을 사랑할 때 우리는 용서와 정의를 함께 추구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 복수심이 아니라 정의를 추구하되 자신의 정서적 만족이 아니라 모두의 유익을 위해 정의를 추구한다면 용서와 정의는 함께 갈 수 있습니다. 복음의 은혜는 개인의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습니다. 용서를 통해 확장됩니다.

기도 : 십자가에서 용서와 정의의 균형을 이루신 주님, 우리 가정도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용서와 정의의 균형을 이루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고상섭 그사랑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