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요 기업 사장단이 상법 개정안 반대를 위해 9년 만에 뭉쳤다. 사장단은 최근 한국 경제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상법 개정이 더 큰 위기를 불러올 것이라며 개정 시도를 멈출 것을 요청했다.
한국경제인협회와 삼성·SK·현대차·LG 등 국내 16개 주요 기업 사장단은 21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긴급 성명을 발표했다. 더불어민주당이 지난 19일 기업의 주요 의사결정 과정에서 일반 주주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이사의 충실 의무를 확대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안을 발의하며 개정 시도가 급물살을 타자 대응에 나선 것이다. 한경협 회원사의 사장단이 공동 성명을 낸 것은 9년 만이다.
사장단은 성명을 통해 “현재와 같은 어려움이 지속될 경우 국내 경제는 헤어나기 힘든 늪에 빠질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내수의 구조적 침체, 수출 주력 업종의 경쟁력 약화에 더해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예상되는 보호무역주의, 지정학 리스크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닥칠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런 위기 속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기업 활력이 크게 저하될 것이라는 게 재계의 주장이다. 다양한 이해를 가진 주주를 모두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소송이 남발되고 해외 투기 자본의 공격이 거세질 수 있으며 이사회의 정상적인 경영 활동과 신성장 동력 발굴이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다. 김창범 한경협 상근부회장은 “올 상반기 내수기업 매출이 1.9% 감소하며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첫 역성장을 기록했다”며 “이 시점에 상법 개정이 우리에게 시급한 것인지, 주가 하락의 원인이 경기 침체가 아닌 지배구조 문제인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상법 개정안에 포함된 총주주의 이익 보호, 감사위원 분리 선출 확대, 집중투표제 의무화 등에 대해서도 재계는 반대 입장을 명확히 했다. 소액주주 권리 보호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자본시장법 개정 등을 통해 합병 과정 등에 주주 권익을 보호할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장단은 경제계가 한국경제의 재도약을 위해 수출 경쟁력 제고와 내수 활성화에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 기업의 성장성 개선과 주주가치 제고를 통해 한국 증시의 매력도를 높이겠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정부에는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과감한 규제개혁과 인공지능(AI)·반도체 등 첨단 산업에 대한 지원 확대를 요청했다. 각국이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하고 첨단산업 지원 총력전에 나서는 가운데 한국이 뒤처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주요 기업 사장단의 마지막 공동 성명은 지난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유행 당시 나왔다. 당시 30대 그룹의 사장단은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정부와 국회가 적극적으로 나서 줄 것을 요청하며 기업인들의 사면과 가석방을 요청했다. 당시 기자회견의 중심 의제가 경제 침체였다면 이번 성명은 특정 법안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됐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윤준식 기자 semipr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