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는 손꼽힐 정도로 많은 양의 닭을 유통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비즈니스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작았다. 1990년대에 들어서자 도계 업계에도 대형 기업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압도적 규모의 기업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대상들도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가만히 있다가는 모든 거래처가 다 사라질 위기였다. 같은 일을 하며 가깝게 지내던 동료 10명과 머리를 맞댔다. 모두 내 생각과 같았다. 이렇게 있다가는 다 잃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뿐이었다.
사장들은 하나같이 동업을 제안했다. 공동 출자해 닭을 대량으로 유통하는 회사를 세우는 데 뜻을 모았다. 그 결과 10명의 사장이 각각 1억원을 투자해 ‘한강CM’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나는 영업 담당 상무로 일하며 매출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 모든 거래처 인맥을 동원해 납품하는 닭의 양을 지속해서 늘렸다.
하지만 사업이 잘되면서 생각하지도 못했던 문제가 벌어졌다. 처음에는 뜻이 맞았던 동업자들과의 관계가 날이 갈수록 삐걱거리는 것이었다. 그래도 좌고우면하지 않고 내 할 일만 묵묵히 했다. 한 번은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 회사에 추가로 투자까지 했었다. 그러나 되돌아오는 건 투자자들과의 갈등뿐이었다. 이때도 용서와 화해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화합을 위해 노력했었다. 하지만 전권을 위임받았던 대표이사와의 갈등이 커지면서 더이상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결국 초창기 동업자 중 나를 포함한 5명의 이사가 회사를 떠나기로 했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일이 있는 법이다. 한강CM에서 나올 때가 딱 그랬다. 마무리도 깔끔하지 못했다. 내 몫의 지분을 매각한 대금을 받아야 했는데 대표는 무려 3년이나 질질 끌다가 뒤늦게 지급했다. 동업은 실패했지만 내 사업은 새로운 기회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지분 매각 대금을 종잣돈 삼아 새로운 사업을 구상했다.
이때 다시 동료 3명과 동업을 결정하고 충주에 있던 도계공장을 넘겨받았다. 이들과의 동업은 2년간 이어졌다. 닭고기 사업 유통의 모든 단계를 알고 있는 내가 사실상 모든 일을 했다. 문제는 또다시 동업이었다. 갈등이 조금씩 커질 때쯤 닭 대형유통사인 마니커 부회장이 도계공장을 팔라는 제안을 했다. 도계공장을 매각하고 이익금을 분배했다. 나는 마니커 계열사로 편입된 충주의 ‘목우촌과 마니커 도계공장’ 대표이사직을 수락했다.
이곳에서 2011년까지 6년을 일했다. 대표이사로서 이 공장에 지분 10%를 투자했고 훗날 12%까지 지분을 늘렸다. 돌아보면 그때가 황금기였다. 처음 18개월은 적자였지만 이 분야에서 쌓은 전문성을 최대한 살려 생산량과 거래처를 늘렸다.
이후 공장은 흑자로 전환됐다. 2008년 국내 최초로 미국으로 수출하는 삼계탕 작업장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월급 받는 대표이사이면서 동시에 지분을 투자한 주주이다 보니 애착이 컸다. 일생 처음으로 다른 사람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일하고 결실을 봤던 때였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맘대로 되던가. 또 다른 먹구름이 몰려왔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