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하게 웃기는 인생] 작은 도서관에서 있었던 실수

입력 2024-11-23 00:32

아내는 산을 좋아하고 나는 바다를 좋아한다. 그래서 바다와 산이 모두 있는 도시 보령으로 이사하게 된 걸 다행으로 생각한다. 서울에서 살다 보령으로 간 뒤 나는 툭하면 아내에게 바다로 놀러 가자고 조른다. 집에서 20분만 달리면 대천해수욕장이 나오기 때문이다. 해수욕장은 철이 지나 한산하고, 특히 아침 일찍 가면 넓은 모래사장을 황제처럼 만끽할 수 있다. 물론 성주산이나 오서산처럼 아내가 좋아하는 산도 가까이 있지만 우리 집에서 승용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므로 바다를 자주 가게 된다.

아내가 홍성 쪽으로 가서 점심이나 먹자 하길래 차의 엔진을 켰다. 가면서 검색을 해보니 ‘광천원조어죽’이라는 데가 리뷰가 좋다고 아내가 말했다. 과연 국수 국물이 시원하고 맛도 좋았으며 무엇보다 사장님이 친절했다. 국수를 다 먹고 남은 국물에 밥 한 공기를 넣고 비비니 비로소 어죽이 됐다. 양이 꽤 되는 밥과 반찬을 다 먹었고 아내는 저녁에 나 먹으라고 소고기 수육까지 따로 포장을 부탁했다. 화장실 간 사이에 아내가 돈을 냈길래 나는 얌체처럼 잘 먹었다고, 수육도 잘 먹겠다고 냉큼 인사를 했다(아내는 페스코 베지터리언이라 고기를 안 먹는다).

웬일로 아내가 바닷가에 가자고 해서 오천항에 가서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그러나 오천항에 커피집은 없고 대신 작은 도서관이 있었다. ‘오천작은도서관’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성인열람실과 아동열람실이 구분돼 있고 서가의 책도 규모에 비해 잘 정리돼 있었다. 먼저 와서 신문을 보던 할아버지 한 분이 나가시자 열람실엔 우리 둘뿐이었다. 마침 여성 원장님이 들어오시길래 얼마 전 보령으로 이사를 온 커플이라 얘기하고 내가 볼펜으로 이름과 전화번호를 쓴 수제명함을 드렸더니 글씨와 종이가 모두 예쁘다며 좋아하셨다.

아내는 천리포수목원 설립자 민병갈 선생의 회고록 등을 읽었고 나는 명강연자 김창옥의 ‘나를 살리는 것들’과 베스트셀러 작가인 고명환의 ‘고전이 답했다’를 읽으며 메모를 했다. 김창옥은 고향 친구의 문자 메시지를 받고 한 달에 일주일은 제주도의 허름한 집에서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다 코로나19가 터지자 제주에서 꼬박 3개월을 머물렀다. 팬데믹은 그에게 시간을 줬다. 처음엔 취소된 강연 때문에 화가 났지만 모든 게 멈추자 어쩌면 이게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무엇이 쉼인지 모르고 살던 그에게 코로나19가 자신을 진정 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고 멈춰 서서 생각해보는 계기를 줬던 것이다.

생각보다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아내가 졸리다고 하길래 가방을 주섬주섬 싸서 나왔다. 그냥 집으로 갈까 하다가 커피를 못 마셨으므로 대천역 근처에 있는 스타벅스보령DT점으로 가기로 했다. 운전을 하고 있는데 아내가 왜 DT점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했더니 ‘드라이브 스루’의 약자라고 가르쳐 줬다. 나는 허무하게 웃었다. 마치 TS삼푸의 TS가 ‘탈모방지샴푸’의 약자인 것만큼이나 웃겼다. 그러고 보니 모르는 약자가 많다. 사람들은 LG가 ‘럭키’와 ‘금성’이 만나서 생긴 걸 알고 있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보니 벌써 스타벅스였다. 반전은 커피숍 안으로 들어가서 일어났다. 가방 안에 고명환의 책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대출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도서관을 나올 때 경고음이 울리는데 여기는 너무 작아서 시설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더구나 고명환의 책은 이미 읽은 거라 더 어이가 없었다. 나는 얼른 도서관으로 전화를 걸어 나의 실수를 고백하고 되도록 빨리 책을 반납하겠다고 말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잘못 가져온 책과 함께 내 책 ‘읽는 기쁨’과 이화경 작가의 소설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도 한 권씩 챙겨 우체국으로 갔다. ‘읽는 기쁨’이라는 책에서 내가 추천해 2쇄를 찍게 됐다면서 출판사 사장님이 개정판 몇 권을 보내 주신 덕분이었다. 정성껏 쓴 사과 편지와 함께 우체국 박스에 넣어 오창작은도서관으로 보냈다.

도서관은 아무리 작더라도 그 지역의 ‘문화 허파’와 같은 곳이다. 그 도시의 문화를 알려면 도서관으로 가보라는 말도 있다. 이사를 와서 지역 도서관을 찾아다니고 있는데 우연히 발견한 작은도서관에 책을 기증하게 돼 기뻤다. 비록 떳떳한 계기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오천작은도서관에서 있었던 작지만 흐뭇한 실수였다.

편성준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