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나그네요 우거(寓居)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위기 25장 23절, 개역한글)
일행과 함께 순례길을 걷다가 저 말씀을 만났다. 토지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조물주이며, 인간은 길어야 100년 나그네로서 임시로 몸을 부쳐 이 땅에 사는 삶이란 배경을 담고 있는 문장이다. 서울 정동 순례길 북서쪽 입구인 ‘여한 한성중화기독교회’(한성교회)에 새겨져 있다.
한성교회는 화교들의 예배 공동체다. 1912년 중국인이던 처다오신(車道心)과 미국인 EM 데밍 선교사가 경성에서 화교를 위한 집회를 열며 시작했다. 112년간 화교들은 일제강점기 만보산사건, 중일전쟁, 한국전쟁, 남북냉전, 한·중수교 등을 겪으며 이 땅에서 굴곡진 삶을 이어왔다.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중국 선교의 꿈을 놓지 않았고 전 세계 화교 네트워크의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여한(旅韓)은 ‘한국에 머무는 나그네’란 의미다.
나그네 정신은 순례길 곳곳에서 묻어난다. 감리교신학대는 최근 한국 기독교 선교 140주년을 맞아 감신대에서 출발하는 순례길 6곳 코스를 개발해 일반에 공개했다. 한성교회를 지나는 코스는 2코스 ‘아펜젤러의 길’에 포함돼 있다. 감신대 역사기념관에서 시작해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D타워 지하의 경기감영 유적전시관을 지나 4·19혁명기념도서관과 경교장을 거쳐 정동 입구 한성교회로 향한다. 이어 아관파천 역사의 현장인 구러시아공사관, 한국 최초 근대 여성학교인 이화학당, 을사늑약이 체결된 중명전을 거쳐 아펜젤러 선교사 주도로 완공된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 동관에서 길을 마무리한다. 한국교회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구한말 격동의 국제정세 가운데 교육 의료 등 근대화의 꽃을 피운 역사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일행을 이끌고 이 길을 걸은 옥성삼 감신대 객원교수는 ‘순례길 3.0’을 강조했다. 과거 다른 교통수단이 없어 오로지 걷기에 의존했을 때가 순례의 원형 그대로였다면, 거기에 관광 개념이 더해져 크루즈 여행이나 맛집 탐방 등이 추가된 순례길 2.0 버전이 있었다고 했다. 이젠 순례길 3.0 시대를 맞아 쉼과 치유와 성찰의 개념으로 골목길 순례가 다시 이어져야 한다고 전한다. 그렇기에 한 시간에 1㎞ 이상 걷는 걸 자제하면서 느린 속도로 묵상을 이어가며 걷는 지역의 터무니를 발견하는 일에 주목하자고 전한다. 여가학을 전공한 옥 교수는 현재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는 종교문화유산의 길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해 순례길 만드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감신대는 서울 서대문구 캠퍼스를 걷는 1코스와 아펜젤러의 길 2코스 이외에도 네 가지 순례길을 소개했다. 모두 감신대 역사박물관 외벽에서 순례의 종을 치며 출발하게 된다. 3코스는 ‘신석구의 길’로 명명됐으며 감신대를 나와 석교교회 독립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옥바라지기념관 딜쿠샤 이회영기념관까지 걷는다. 독립운동을 생각하는 길이다. 4코스 ‘캠벨의 길’은 배화여고 자교교회 종교교회를 향하며 남감리회와 여성선교에 주목하는 코스다. 5코스 ‘스크랜턴의 길’은 아현감리교회를 지나며 시약소를 통해 가난한 이들에게 무료로 약을 나눈 의료선교를 기억하는 길이다. 마지막 6코스는 감신대에서 정동을 거쳐 남대문 상동교회와 기독교청년회(YMCA) 가우처기념예배당 탑골공원에 이어 동대문교회터까지 서울을 횡단하며 140년 한국 감리교회 역사를 성찰하는 길이다.
나그네는 길을 떠난다. 복음의 행로를 밟는 순례길을 걸으며 비움의 미학을 체감한다. 교회 학교 병원을 세워 끊임없이 베풀고 헌신하면서도 자신의 몫을 주장하지 않았다. 주께서 하신 것처럼 늘 겸손했던 믿는 이들의 흔적을 서울 도심 순례길에서 만날 수 있다.
우성규 종교부 차장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