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사다마라는 말을 체감하던 시절이었다. 무엇보다 날 곤경에 빠트린 이들을 신앙 안에서 용서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결혼은 나를 성숙하게 했다. 가정을 꾸린 뒤 사업도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동생의 황망한 죽음은 나를 다시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다. 죽음의 이유도 알 수 없는 처량한 죽음이 날 아프게 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했다. 먼저 떠난 동생은 가슴에 묻었다.
1987년 당시 나는 용산에 있던 원일상회 직원이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성실히 일했다. 일이 손에 익을수록 사업을 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당장 점포를 빌릴 돈도 없었고 무엇보다 성공에 대한 보장이 없다 보니 섣부른 도전이 어려웠다.
결국 원일상회 한쪽 구석에서 사업을 시작해보자는 묘책을 냈다. 가게에도 양해를 구한 뒤 닭 100마리를 샀다. 내 사업 마중물과도 같았던 닭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거래처를 하나둘 늘려나갔다. 생닭 공급 업계에서 잔뼈가 굵었던 나는 빠르게 자리 잡았다. 거래처는 서울 전역 식당으로 퍼져나갔다.
거래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용이 생명 같았다. 정해진 시간에 약속된 물량을 반드시 배달했다. 닭의 신선도가 중요했기 때문에 배달 시간을 줄이는 게 관건이었다. 잠시도 쉴 새 없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일하는 만큼 수입이 늘었기 때문에 힘든 줄도 몰랐다.
일을 하다 보니 유독 은평구에 거래처가 많아졌다. 회사를 거래처 근처로 옮기기로 했다. 점포를 임대해 ‘보람유통’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집도 근처로 이사했고 동네 교회에 등록도 마쳤다. 그 교회가 지금까지 다니고 있는 염광교회다. 이 교회에서 신앙이 성장했고 장로까지 됐다.
치킨이나 삼계탕을 파는 가게들은 그날 배달을 선호했다. 매일 필요한 분량의 닭을 정확히 배달해야 했다. 주일에도 쉴 수 없었던 이유였다. 닭은 불티나게 팔려나갔지만 바쁜 일상이 반복되면서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무엇보다 주일성수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아내도 걱정했다.
문제는 주일에 쉬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할 게 많아진다는 것이었다. 식당은 주일이 대목이다 보니 닭이 평소보다 더 많이 필요했다. 토요일에 이틀치 닭을 배달할 수도 있지만 이건 전적으로 식당 냉장고에 달려 있었다. 대부분 식당이 이틀간 사용할 닭을 보관할 만큼 큰 냉장고를 갖고 있지 않았다. 거래처 중 반드시 주일에 닭을 납품받아야만 하는 곳은 관계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매일 40~50군데 식당에 닭을 납품했는데 절반 가까이 떨어져 나갈 걸 각오했다. 우리 같은 업체가 식당과 거래를 틀 때 계약서를 쓰는 것도 아니다 보니 평소에도 거래처들이 수시로 떨어졌다가 다시 생기길 반복했다. 그만큼 거래처 등락이 일상적이었다.
주일에 쉬기로 결정한 뒤 일일이 거래처를 돌며 양해를 구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한두 군데 식당만 거래를 중단했을 뿐 나머지 식당들은 우리 결정을 존중해줬다. 그렇게 5년 사이 직원은 20명으로 늘었고 서울의 대상(大商) 중 하나로 성장해갔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