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관계 장면을 찍은 영상이 없는데도 있는 척 상대를 협박한 경우 형량이 더 무거운 성폭력처벌법이 아닌 형법상 협박죄로 처벌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1부(주심 서경환 대법관)는 살인, 스토킹처벌법·성폭력처벌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20대 김모씨에게 징역 30년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고 19일 밝혔다.
김씨는 지난해 5월 경기도 안산의 한 모텔에서 전 여자친구 A씨를 목 졸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됐다. 김씨는 범행 전 A씨에게 열흘간 481차례 연락하는 등 스토킹했다. 답을 하지 않으면 성관계 영상을 가족 등에게 유포하겠다고 협박했다. 범행 당일 “작별 인사를 하겠다”며 A씨를 꾀어낸 후 살해했다.
재판에서 성관계 영상 유포 협박을 어떤 혐의로 처벌할 것인지가 쟁점이 됐다. 검찰은 김씨가 영상 내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며 협박했다며 징역 1년 이상으로 처벌하는 성폭력처벌법을 적용해 달라고 요구했다. 김씨는 겁을 주려 동영상이 있는 것처럼 거짓말했다고 주장했다. 수사 과정에서 불법촬영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1·2심은 처벌 수위가 낮은 일반 협박죄를 적용했다. 2심은 “성폭력처벌법상 협박죄가 성립하려면 협박에 쓰인 성적 촬영물이 실제 존재해야 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살인 등 나머지 혐의는 모두 유죄로 인정해 징역 30년을 선고했다.
검찰은 성폭력처벌법이 적용돼야 한다며, 김씨는 형이 무겁다며 상고했지만 대법원은 원심을 확정했다. 협박범이 과거 성적 촬영물을 갖고 있었다면 협박 당시 유포 가능한 상태가 아니었더라도 성폭력처벌법 적용이 가능하다는 게 대법원 판례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번 사안에서는 촬영물 존재 자체가 입증되지 않아 해당 규정을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