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3학년인 A양은 지난 14일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렀다. 고3 학생에겐 당연한 일이지만 A양에게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불과 올해 초까지만 해도 A양은 수능을 보고 대학 진학 등 진로를 꿈꾸는 삶을 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자해와 자살 시도를 반복하면서 당장 내일이 불투명한 하루를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A양에게 처음 문제 증상이 나타난 건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친구 문제로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던 A양은 부모님에게도 내색하지 못한 채 혼자 우울증, 조울증을 겪었다. 공부를 잘하고 말을 잘 듣던 딸이 갑자기 가족과 일절 말을 하지 않고, 늦게 일어나 학교에 늦거나 며칠 동안 씻지 않은 채 휴대전화만 보고 있는 날이 반복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A양 부모는 딸이 단순히 사춘기를 겪는 것이라고 여겼다.
혼자만의 세상에 갇힌 A양에게 어느 날 환청이 들려왔다. 그때부터 A양은 자해를 시도하기 시작했고 두 차례 자살 시도까지 했다. 아예 등교하지 못하는 날이 많아지자 이를 눈치챈 교사가 여성가족부가 운영·지원하는 청소년상담복지센터에 A양의 상담을 의뢰했다. 고위기 청소년을 위한 상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곳이었다.
A양은 바로 정신의학과 치료를 받는 동시에 센터 상담을 시작했다. 3개월 넘게 A양을 지켜본 최경림 경남 통영시청소년상담복지센터 상담팀장은 22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처음 A양을 봤을 때만 해도 무기력증에 식사하지 못하거나 밤에 잠자리에 들지 못해 체중이 빠진 상태였다”며 “아주 작은 일상의 루틴을 만드는 것부터 회복 프로그램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마음건강의 골든타임
센터는 A양을 위해 ‘행동 활성화 개입’을 시작했다. 일상생활을 서서히 회복하도록 돕는 것이다. 최 팀장은 “일상적인 루틴을 찾아가는 게 회복되면 ‘내가 또래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며 “본인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공부 시간을 추가해 보기도 하고, 기상 시간도 정해주는 등 일상을 되찾기 시작하면서 친구 관계에서도 호전을 보였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A양은 우연히 센터 근처에서 진행하는 글쓰기 직업 전문가 강연에 참여했다. 우울증에 빠지기 전 자신이 글 쓰는 것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A양은 문예창작과 진학을 목표로 공부하기 시작했고, 수능도 무사히 치렀다. 최 팀장은 “보통 청소년의 경우 자살이나 자해 문제가 나타나면 주변에서 염려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나는 민폐를 끼치는 사람’이라는 죄책감이 커지게 된다”며 “상담을 통해 ‘너는 보통의 사람이고 평범하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주면 아이들의 마음건강을 회복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고위기 청소년에 대한 마음건강 돌봄은 중요하다. 만성화로 이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정신건강의 ‘골든타임’이기 때문이다. 치료 시기를 놓치면 학교 울타리를 벗어나 도움을 받기 더 어려워진다. 증상이 악화하면서 위험한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여가부가 청소년 마음건강 지원 사업을 진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가부에 따르면 2023년 4000여명, 올해 9월 기준 6000여명의 자살·자해 위기 청소년에게 상담과 의료 지원 등을 제공했다. 이를 통해 지난해 참여한 청소년의 자살 위험성은 36%, 자해 위험성은 50% 감소하는 성과가 나타났다.
지역 기관과 촘촘한 연계
부산에 사는 B군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자해를 시작할 정도로 높은 자살 위험성을 보였다. 환청과 환시를 경험하면서 위험성이 높아진 B군을 학교에서 청소년 상담복지센터로 연계해 줬다.
B군의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집에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경제적 어려움이 컸다. 여가부는 지역 내 청소년 안전망을 통해 긴급지원금과 밀키트, 장학금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청소년복지 지원법에 따라 학교와 경찰서, 청소년쉼터, 청소년 상담복지센터 등 필수기관이 상호 협력하는 사업이다. 위기 청소년을 조기에 발견해 보호·구조하고 필요한 경우 의료 지원이나 학업·자활 등의 서비스도 연계해주는 방식이다.
청소년 안전망을 통해 병원 진료와 상담을 병행한 B군은 특히 베이킹 클래스에 흥미를 보였다. 쿠키와 빵을 만드는 경험을 하면서 자존감 회복에 도움을 받았고, 친구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학교생활도 이어나가고 있다.
학교나 기관의 연계 없이 위기 청소년이 직접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창구도 있다. ‘청소년상담 1388’과 ‘청소년상담복지센터’를 통하면 언제든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다. 또 청소년뿐 아니라 부모가 직접 거주지 인근에서 서비스를 찾아 신청할 수 있는 ‘청소년 1388 포털’도 지난 5월부터 운영 중이다.
신영숙 여가부 차관은 “청소년기에 겪는 마음건강 문제는 성인이 된 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초기에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 차관은 “전문 상담사들이 청소년이 마음의 문을 열고 변화할 수 있도록 사명감을 가지고 현장에서 애쓰는 만큼 여가부는 현장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해 청소년들이 사회 일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속해서 지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유나 기자 spr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