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학 목사의 우보천리] 기독교 현세주의에 대한 유감

입력 2024-11-20 00:35

철학자 탁석산씨가 쓴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이 있다. 저자는 책에서 지난 100년간 오늘의 역동적 한국사회를 이루는 데 이바지해 온 네 가지 생활철학 내지 일상철학이 있다고 본다. 이 세상이 전부이고 내세는 없다는 현세주의, 인생의 기쁨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인생주의, 어차피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니 크고 작은 실패에 너무 속상해할 필요가 없다는 긍정적 허무주의, 그리고 실용주의이다.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100년 이전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지난 100년간의 한국인은 현세주의자들이다!”라는 대목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한국인만큼 종교심이 강한 민족이 없다. 거기에 한국의 기존 주류종교라 할 수 있는 유교는 제사를 지내고 불교는 윤회와 극락을 믿는다. 거기에 지난 100년 사이에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한 기독교는 강력한 내세 신앙을 갖고 있다. 그런데 한국인이 현세주의자들이라니? 저자는 이유가 있다고 본다. 한국인은 종교를 믿어도 대단히 현세적으로 믿는다고 한다. 유교나 불교는 말할 것도 없고 강력한 부활신앙을 가진 기독교도 신앙을 현세주의적으로 믿는다 한다. 그래서 한국기독교는 현세에서는 복과 평안을 추구하고 죽으면 천국에 가서 영생을 누리는 신앙관을 갖고 있다고 본다.

그러면서 저자는 반문한다. “기독교가 지난 1세기 동안 한국에서 상당한 세력을 불렸지만, 과연 한국인의 삶의 양식을 바꾸었는가. 지난 한 세기 한국인의 근본적 변화는 서양적 삶의 양식을 따라간 것에서 온 것이지 기독교 때문은 아니지 않은가.” 목사인 나한텐 뼈아픈 지적으로 느껴졌다. “당신은 한국기독교를 잘못 알고 있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기독교가 기복주의를 비롯한 다양한 현세주의적 성향을 띠어왔기 때문이다. 한국기독교가 200년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정말 진지하게 자신을 성찰해 볼 부분이다.

성경적으로나 교리적으로 기독교는 현세주의적일 수가 없다. 물론, 그렇다고 기독교가 ‘내세주의적’이란 말은 아니다. 참된 기독교 신앙에서 현세와 내세는 유기적으로 연결돼 서로에게 긴밀한 영향을 미친다. 현세를 살되 여기서 영원히 살 것같이 하지 않고 저 천국을 바라보며 객과 나그네로 살아간다. 이 천국신앙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되면 따라올 수밖에 없는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다. 또한 천국에 대한 본향 의식을 갖고 살아가되 ‘지금, 여기(here and now)’를 영원히 살아가듯 최선을 다해 살아낸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신실하게 추구하면서 말이다. 이를 일컬어 ‘종말론적 삶(Eschatological life)’이라 한다. 이 종말론적 삶의 양식이 사도적 신앙고백을 하는 성도의 삶이다. 양자의 긴장을 놓치는 순간 기독교 신앙은 그 고유한 맛과 멋을 잃게 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어느 순간부터 한국기독교는 이 긴장을 잃고 기독교 현세주의 신앙이 교회 안에 똬리를 틀었다. 이 땅에서는 복과 평안을, 저 세상에서는 영생을 얻는 기복주의, 기독교 복음을 생명이 아니라 도덕과 윤리로 환치하는 자유주의적 도덕주의나 율법주의 신앙, 바른 신앙을 특정 정치이념과 동일시하는 근본주의 신앙은 사실 모두가 일종의 기독교 현세주의의 변종이다. 여기에는 “오직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는 진정한 신앙고백이 없다. 그리스도의 철저한 주재권 대신에 자기 안위, 도덕적 가치, 이념, 특정 교리와 신조가 그리스도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한다. 그래서 사도적 신앙고백의 삶이요 성경적 삶인 종말론적 삶을 대치한다.

필자는 이 기독교 현세주의의 다양한 변종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를 초래한 암적 존재가 되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자신을 깊이 성찰해야 한다. ‘진정 내게 그리스도 그분만이 유일한 구주이신가. 그리스도의 자리를 다른 누군가에게 넘겨주거나, 그분만이 차지할 자리를 대등하게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명료한 신앙고백이 영혼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기를 기도한다. “주님! 주가 그리스도시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이상학 새문안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