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 트럼프와 비욘세, 그리고 기름값

입력 2024-11-20 00:37

미국 대선 캠페인 동안 만난 많은 유권자가 경제를 언급하며 한목소리로 불만을 토해낸 것이 비싼 기름값이었다. 흔히 ‘가스’로 부르는 가솔린(휘발유) 가격이 조 바이든 행정부 들어 폭등해 견디기 어려울 지경이라는 원성이었다. 기름값이 오른다고 자가용 사용을 줄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미국은 땅덩어리가 거대한 데다 대도시를 제외하곤 한국처럼 지하철이나 버스가 발달해 있지도 않다. 출근하기 위해, 자녀를 학교에 데려다주기 위해 가정마다 자가용이 2대인 집이 흔하다.

기름값이 오르면 살림살이는 실시간으로 직격탄을 맞는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의 첫 임기 동안 휘발유 가격은 갤런당 평균 2.48달러였지만 바이든 행정부 들어서는 3.49달러가 됐다. 바이든 행정부는 전략비축유를 풀어 기름값을 떨어뜨렸지만 지금도 워싱턴DC 인근 버지니아주의 기름값은 갤런당 3달러 수준이다. 한국에서 정권이 바뀌었는데 대중교통 요금이 1.5배 가까이 올랐다고 상상해보자. 미국민이 느끼는 불만이 바로 그런 것이다. 트럼프는 선거운동 내내 기름값을 파고들었다. 트럼프는 “내가 퇴임했을 때 휘발유 가격은 1.87달러였다. 실제로는 그보다 낮은 달도 많았다”고 했다. 한 유세에서는 갤런당 목표 가격이 1.87달러라는 주장을 19번이나 되풀이했다. 트럼프 특유의 과장이 섞인 것이지만 어쨌거나 그의 재임 시절 휘발유 가격이 낮았던 건 사실이다. 다시 집권하면 기름값을 40% 깎아준다니 서민들에게는 이보다 더 달콤한 공약은 없었다. 대책도 이해하기 간단했다. 트럼프는 “드릴 베이비 드릴(더 시추하자)”을 외치며 ‘액체로 된 금’인 석유를 더 생산하면 그만이라고 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집권 기간 경제성장률이 높았고, 새 일자리도 증가했다는 통계를 내내 홍보했다. 기름값이 오른 것도 바이든 행정부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코로나19 팬데믹에서 벗어나면서 수요가 증가했고, 중동의 정정 불안이 가격 상승을 견인했다. 하지만 이런 매끈한 설명은 경제학과 학생을 설득할 수는 있어도 분노한 서민을 달랠 수는 없다. 유권자는 설명이 아니라 대책을 요구했다. 휘발유 1갤런, 달걀 한 판처럼 소비자가 체감하는 물가 폭등에 민주당의 대책은 무기력했다. 선거 당일 조사 결과 경제가 최대 이슈라는 유권자가 40%에 육박했지만 민주당의 선거 전략은 “위험한 트럼프가 돌아온다”였다. 중범죄자이자 의회 폭동을 선동한 트럼프가 돌아오면 미국 민주주의가 붕괴한다는 ‘종말론적’ 공포 마케팅이었다. 여기에 민주당이 늘 하던 대로 낙태, 성소수자 문제 등 진보적 의제를 내세웠다. 그리고는 비욘세, 테일러 스위프트, 에미넴 등 유명 셀럽의 지지를 끼워팔며 선거를 축제화했다. 하지만 그들만의 축제였고 그들만의 진보였다.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미국 공영라디오 NPR은 선거 결과에 대해 “물가가 치솟으면 권력을 쥔 정치인들이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고 요약했다.

민주당이 치른 뼈아픈 대가는 선거인단뿐 아니라 총투표수에서도 트럼프에 크게 졌다는 점이다. 트럼프는 7650만여표를 받았는데, 해리스는 7388만표를 얻는 데 그쳤다. 2020년 대선에서 바이든은 8128만여표, 트럼프는 7422만여표를 받았다. 트럼프의 득표수는 200만여표가 늘었지만 해리스의 득표수는 바이든보다 무려 700만표 가까이 줄었다. 트럼프가 이겼다기보다 바이든 행정부가 졌다는 게 차라리 더 정확한 설명일지도 모른다. 셀럽을 내세워 외치는 ‘자유’ ‘진보’ 등 정의롭지만 추상적인 말은 매일 수치로 확인되는 기름값 앞에서 아무런 힘이 없었다. 아무리 비욘세가 좋아도 내 기름값을 대신 내주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임성수 워싱턴 특파원 j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