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엄마의 딸기

입력 2024-11-20 00:32

지금껏 그래왔듯 사랑받은 기억은 전 생애에 걸쳐 나를 돕고 지키고 살게 할 것이다. 이런 믿음과 확신에는 엄마의 딸기가 있다. 천억 금을 준다 해도 바꾸지 않을 딸기를 오랜만에 한 입 베어 물었다.

어릴 적, 점심 무렵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와 동생이 항상 집에 있었다. 하지만 그날은 대문을 열고 엄마를 불러도 인기척이 없었다. 대신 현관문에 네모난 쪽지가 붙어 있었다. “딸, 학교 잘 다녀왔어? 부엌으로 가봐.” 조심스레 문을 열고 잰걸음으로 부엌을 향했다. 여기서부터 부엌이라고 구역을 정한 듯 배치된 찬장에도 쪽지가 붙어 있었다. “딸, 냉장고 앞으로 가.” 책가방을 내려놓는 것도 잊을 만큼 긴장했던 나는 엄마와 재밌는 놀이를 하는 것 같아 금세 신이 났다. 냉장고 문을 열라는 쪽지를 재빨리 읽고 힘껏 손잡이를 당기자, 손만 뻗으면 닿을 선반 위에 잘 익은 딸기가 소쿠리 가득 담겨 있었다. 그리고 쟁반 옆에 놓인 마지막 쪽지에는 “우리 딸, 딸기 맛있게 먹어”라고 적혀 있었다. 8년 차 인생에 태어나 처음 나 홀로 집에 있었지만, 단내가 폴폴 풍기는 딸기를 오물오물 씹어먹던 내 곁에는 분명 엄마가 있었다.

급히 동생을 데리고 병원에 가야 했던 엄마는 내 하교시간까지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았고 걱정되는 마음에 묘수를 생각했을 것이다. 상한 딸기를 골라내고 딸기 꼭지를 떼어낸 뒤 내가 알아볼 수 있게 또박또박 글씨를 썼겠지. 딸의 눈높이를 가늠해 허리를 숙이고 여기저기 쪽지를 붙이는 엄마의 모습을 그려본다. 짤막한 기억 속 어느 찰나에도 그녀의 보살핌과 사랑이 넘친다.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도 엄마의 딸기는 내 움츠린 어깨를 감싸고 세상의 시린 바람을 데운다. 사랑받은 기억이야말로 부모로부터 자식이 물려받는 가장 귀한 유산이 아닐까. 그리하여 일평생 나는 사랑의 온기로 충만하여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으리. 이 은혜를 갚자니 천년의 시간도 턱없이 짧다.

함혜주 이리히 스튜디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