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재곤 (7) 신앙 안에서 삶 안정… 믿음 좋은 아내에 끌려 결혼

입력 2024-11-20 03:04
김재곤 가마치통닭 대표가 1985년 4월 13일 김상숙씨와 서울 성북구 태극당예식장에서 결혼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돌아보면 기가 막힌 일이었다. 하지만 용서하니 삶 속의 작은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왔다. 억울하게 재판을 받기 한 해 전이던 1983년 잠시 중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구의 권유로 안암동 영암교회에 출석했다. 이듬해 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신앙 안에서 삶이 안정하면서 큰 기쁨도 찾아왔다. 아내와의 만남이다. 보문동에서 일하던 때였다. 하루는 거래처에 수금하러 갔는데 사장 조카가 자기 친구를 소개했다. 이름은 김상숙이었다. 상숙씨는 군산여상을 졸업한 뒤 섬유회사 재무담당 경리로 일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신앙인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만남은 진지했다. 다방과 빵집, 극장 순례가 고작이던 데이트였지만 행복했다.

사실 보잘것없던 날 만나주는 것만 해도 감사했다. 자격지심에 그만 만나면 좋겠다고까지 말했던 적이 있었다. 내가 미련했다. 내가 흔들릴 때마다 날 붙잡은 건 그녀였다. 결국 장인, 장모님이 될 어른들께 인사까지 드릴 수 있게 됐다. 어르신들은 서울분들로 6·25전쟁 때 군산까지 피란을 가서 8남매를 낳아 키우셨다. 내겐 과분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우린 서로의 진심과 진가를 확인했다. 우여곡절도 많아 주변에서 만류하는 이들도 있었고 친구 중엔 간섭까지 했다.

어느 날 상숙씨가 “맞벌이하면서 살자”고 했다. 청혼이었다. 당장 결혼하고 싶었지만 돈이 문제였다. 1985년 1월 여동생이 결혼하면서 혼수 장만을 위해 가진 돈을 거의 다 쓴 뒤였다. 남동생 세곤이도 중앙대에 입학하면서 등록금을 내줬다. 빈털터리였던 내 처지를 알고 처남과 동서들이 십시일반 도움을 줬다. 그해 4월 13일 돈암동 태극당 예식장에서 간소하게 결혼식을 했다. 신혼여행은 당시 인기 있던 불국사와 부곡온천으로 다녀왔다. 축의금 200만원으로 가게 근처 보문동 산동네에 신혼집을 마련했다. 부엌도 없는 단칸방이었지만 행복했다. 아내가 먼저 출근하면 난 설거지부터 좁은 집의 구석구석을 쓸고 닦았다.

행복한 시절은 길지 않았다. 결혼 이듬해 원효로의 조금 넓은 집으로 이사했을 때쯤이었다. 하루는 숭인동 여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오빠, 세곤이가 집에 사흘째 안 들어오는데 걱정돼 죽겠어요.” 야간대학에 다니면서 낮엔 일하고 무척 성실했던 동생이었다. 큰 걱정은 되지 않았는데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가출 신고를 하기 위해 파출소로 달려갔다. “대학에 다니는 제 동생이 며칠 동안 집에 오지 않아 가출 신고를 하려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관내에서 변사체가 발견됐는데 혹시…”란 답이 허공을 갈랐다. 경찰관의 입에선 정확히 세곤이의 모습이 묘사되기 시작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동생이 발견된 곳은 낙산 절벽 아래였다. 그 시절 대학생들은 민주화 운동으로 연일 시위를 했지만 세곤인 아르바이트와 도서관, 강의실만 오갔다. 죽을 이유가 없었다.

동네를 다니며 알아보니 이웃에 살던 한 여중생이 동생을 짝사랑한 게 이유였다. 그 여중생이 동생을 일방적으로 따라다니자 학생 부모가 세곤이를 다그쳤다고 했다.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다. 그 일이 있은 후 절벽 아래에서 싸늘하게 식은 세곤이가 발견된 것이었다. 날로 그리움만 커질 뿐이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