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지옥에서 온 판사’엔 한 악덕 기업가가 등장한다. KO푸드 대표이사 최원중(오의식 분)이다. 그는 열악한 근무환경에 처한 직원들이 산업재해로 죽도록 내버려 둔다. 이후 비리에 맞선 노조위원장 원창선(강신일 분)을 폭행, 살해한다. 최원중은 기독교인으로 등장하는데 노조위원장 살해 혐의로 재판을 받다 검찰과 법원에 청탁을 넣은 뒤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그는 교회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기도한다. 내 죄를 사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늘 제 편이 되시고 저와 함께하셔서 남들보다 풍요롭고 건강한 삶, 축복 된 삶을 살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드라마를 보는데 최원중의 기도가 너무 역겨운 거예요. 그런데 문득 이 장면에서 제 모습도 보이더라고요. 나도 당장 어제 저런 감사 기도를 한 것 같은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내 기도도 이렇게 역겨울까.’ 드라마가 끝난 뒤에도 계속 고민했어요. 그러다 한 가지 결론을 내렸죠.”
최근 서울 강북구 대한병원에서 만난 정미라(66) 대한기독여자의사회 회장은 “기도는 누구나 가식적으로 할 수 있다”며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사는지, 오로지 자신의 영화로만 여기는지에 따라 믿음의 차이가 생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학 때부터 이어온 의료 봉사는 인심 써서 하는 게 아니라 몸이 따를 때까지 꼭 해야 할 사명”이라고 했다.
의료봉사는 사랑의 화수분
정 회장은 자신의 노력만으로 의사가 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단번에 의대에 진학할 수 있었던 것도, 진단검사의학과 전문의가 된 것도, 의사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룬 것도 모두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매주 교회에 나가고 기독교 학교에 진학하게 되는 등 하나님께서 믿음의 환경을 조성해주셨다”며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과 지식을 주님의 일에 사용하는 건 당연하다”고 말했다.
정 회장이 다녀온 최근 해외 의료봉사는 지난 8월이다. 대한기독여자의사회 회원들과 일주일간 필리핀 의료선교를 다녀왔다. 국내에선 한 달엔 한 번씩 경기도 안산 사랑의동포교회를 찾아 외국인 이주민들을 진료·치료한다.
“4시간만 비행기를 타고 가도 병원 한 번 못 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올여름 필리핀 선교에선 배가 터질 듯 부른 22세 당뇨병 환자를 만났어요. 혈당이 400mg/dL(정상 수치의 약 4배)를 넘었는데 ‘병원 갈 사정이 아니다’라고 하더라고요. 이런 어려운 분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부터 은혜이고 감사입니다.”
그는 “대학 시절 해외 의료봉사를 처음 갔을 때 생각은 솔직히 ‘이런 데 안 태어난 게 다행이다’였다”면서도 “봉사를 다녀오면 다녀올수록 ‘다음에 또 와야겠다’는 생각이 커졌다”고 했다. 이화여대 의과대학생 시절 기독의학생(CMSA)으로 활동했다던 그는 “이젠 나이가 들고 대한기독여자의사회에서 복음을 전하는 의료봉사의 기회를 얻었다”며 반색했다.
“불신자를 말로 이길 용기는 없지만”
그는 숱한 의료봉사를 다녔지만 지금까지 전도에 성공한 적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교회에 안 나오겠다는 이를 설득할 자신도 없고 말싸움에서 이길 용기도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대신 그리스도인다운 삶으로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게 목표라고 했다.
“직원들한테도 직접 전도를 한 적은 없어요. 그저 믿지 않는 사람보다 조금 더 예쁘게 말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려 애씁니다.”
“예수 믿어야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주변 동료들은 복음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올여름엔 30년 지기 임상병리사가 정 회장의 제안으로 의료선교에 동행했다고 한다. 정 회장은 “환갑 선물로 경비를 대줄 테니 필리핀 의료봉사에 같이 다녀오자고 제안했다”며 “의료봉사를 다녀온 뒤 교회에 열심히 다니진 않았던 그 친구가 ‘다시 교회에 잘 나가야겠다’고 하더라. 대한기독여자의사회 안산 의료봉사에도 함께하겠단 약속도 했다”고 말했다.
정 회장이 과장으로 있는 대한병원 진단검사의학과에도 동료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다. 정 회장은 “우리 과 직원 6명 중 4명이 교회에 다닌다”며 “신앙 얘기를 하는 게 즐겁고 교회에 잘 안 간다던 직원도 ‘다시 교회에 간다’고 할 때가 일터 선교사로서 가장 기쁜 순간”이라고 했다.
정 회장은 “병원은 가장 간절한 기도가 드려지는 곳”이라 말했다. 생사를 오가는, 생명을 다루는 곳이라서다. 그는 ‘진단검사의학과 전문의’와 ‘일터 선교사’로서 자신의 역할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서 자신의 사명을 재확인했다.
“진단검사의학과의 역할은 진료하는 의사들이 신뢰할 수 있는 검사 결과를 내는 거예요.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진 진찰은 할 수 있어도 진단은 할 수 없거든요. 결국 병원에서 제 역할은 다른 의사들에게 믿음을 주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제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웃들이 믿도록, 선한 영향력을 전하겠습니다.”
이현성 기자 sag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