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여행 떠나는 책, 책으로 하는 연결

입력 2024-11-15 00:32

스승과 서점에 갔다가 양손 묵직하게 책을 산 날이었다.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데 팔이 저렸다. 내가 책이 무겁다고 말하자, 스승이 말했다. “미나야. 나는 다른 건 무거워도, 책은 하나도 안 무거워.” 그때 머릿속에 작은 번개를 맞은 것 같았다. 부끄러워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스승은 내가 아는 사람을 통틀어, 가장 자주 책을 구매하는 분이었다. 후배 시인의 첫 시집은 물론 사들이는 책 분야도 광범했다. 길고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책장에 푹 파묻은 채, 과자를 집어 먹으며 만화책 읽는 것도 좋아하셨다.

처음 스승 댁에 놀러 갔다가 내심 놀랐었다. 책을 사는 것에 비해, 집안에 책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마저 남은 책들은 대부분 신간이었다.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았다. 스승은 책을 읽고 나면, 쌓아두지 않고 친구나 지인들에게 두루 선물했다. 그러니 스승의 방은 책이 잠시 머물다 떠나는 ‘휴게소’와 같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가볍고 홀가분해 보이던지. 집에 돌아온 나는 빽빽한 책장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꽂아 놓으면 근사해 보이는 영어 원서. 졸업 이후 들춰보지 않은 전공 서적, 포장도 채 뜯지 않은 문예지가 작은 탑처럼 바닥에 쌓여 있었다.

얼마 전 신연선 작가의 SNS를 보다가 흥미로운 글을 봤다. “책도 여행하듯이 더 넓은 세상과 만나야 하는 게 아닐까? 책장에만 갇혀 있느라 얼마나 답답할까. 한 권, 한 권, 소중하게 산 책이라, 허투루 버리거나 중고로 팔아버리기는 아쉽다. 그렇다면 “책으로 하는 연결은 어떨까?” 이와 같은 뜻으로 연남동 ‘마바사’라는 공간에서 책 플리마켓을 연 것이다. 판매 대금은 전액 팔레스타인 평화 연대에 기부한다고 적혀 있었다. 나는 무릎을 탁 쳤다. 그리고 그다음 주자로 바통을 이어받았다. 공간이 남은 책장을 보니, 비운 만큼 뿌듯함이 차올랐다. 새 주인을 만난 책은 지금쯤 어디로 가고 있을까?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