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해 후 자살을 명백한 아동학대로 보는 시각과 달리 수사·사법기관은 살해 후 자살 사건에서 아동학대를 입증하고 판단하는 데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 왔다. 법원이 최근 10년간 판결한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 102건 가운데 ‘아동학대’ 혐의가 적용된 것은 8건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을 어떤 피해자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법무부·보건복지부·여성가족부 등으로 나뉘어 지원이 이뤄지는 현행 체계로는 살해 후 자살 피해 아동의 특수성에 맞춘 지원이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학대 혐의 적용 안 되는 자녀 살해
국민일보가 13일 국제아동권리 비정부기구(NGO) 세이브더칠드런과 2014~2023년 ‘살해 후 자살’ 판결문 102건을 분석한 결과 가해 부모에게 ‘아동복지법 위반’ 혐의를 인정해 형량을 정한 사건은 8건(7.8%)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아동학대 혐의는 빠진 채 살인 또는 살인미수 혐의만 적용됐다.
2021년 3월 아동학대처벌법상 ‘아동학대살해·치사죄’가 신설됐다. 그 이후 발생한 살해 후 자살 21건 중 8건에서 3~17세 아동·청소년 9명이 살해된 것으로 파악됐다. 하지만 아동학대살해·치사죄가 적용된 사건은 없었다. 수사 단계에서 가해 부모의 살인을 ‘학대에 의한 살인’으로 적극적으로 판단하지 않았거나 재판 단계에서 혐의를 추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동학대살해(사형·무기 또는 7년 이상 징역형)는 형법상 살인(사형·무기 또는 5년 이상 징역형)보다 형량이 무겁다.
살해 후 자살 사건의 경우 학대 입증이 까다로운 점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강동욱 동국대 법학과 교수(한국아동학대예방협회 부회장)는 “법리적으론 ‘생명 박탈’만으로 학대가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신체·정서적 학대에 대한 입증 문제가 남는다”며 “평소 자녀와 친밀하게 지내던 부모가 살해 후 자살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 보니 학대 판단이 어렵고, 학대 정황이 명백하지 않아 살인·살인미수를 적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다수 피해 아동은 부모가 자신을 살해할 것을 알지 못했다. 102건 가운데 부모의 아동학대나 가정폭력 등이 파악된 사건은 12.8%(13건)에 불과했다. 이세원 강릉원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살해 후 자살 가정의 경우 대체로 아동학대 이력이 없는 평범한 가정이 많고, 아이들이 부모를 평소 믿고 의지할 만큼 친밀한 관계가 많다”고 설명했다.
아동 대상 심리 상담도 안해
전문가들은 살해 후 자살 피해자들을 위한 별도의 보호체계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관련 매뉴얼이 전무한 상황에서 현장의 판단은 제각각이다. 가해 부모가 자녀 살해 미수에 그치고 본인은 사망하면 아동은 살해 후 자살이라는 아동학대 피해자가 아니라 자살 유가족이나 살인미수 범죄 피해자 등으로 분류된다.
이런 경우 법무부 산하 범죄피해자지원센터로 연계된다. 문제는 이 센터의 경우 아동 맞춤형 서비스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아동을 위한 별도 쉼터도 없을 뿐더러 연령대별로 지원이 이뤄지기도 어렵다. 피해 아동 또는 보호자가 도움을 원하지 않으면 개입할 수도 없다.
한 범죄피해자지원센터 관계자는 “심지어 피해 아동과 가해 부모가 분리되지 않더라도 센터에서 강제분리 조치를 할 권한이 없다”며 “상담비나 생활비 등 물질적 지원을 할 순 있지만 아동 대상 심리 상담도 직접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일부 피해 아동은 여성가족부 산하 가정폭력 피해 쉼터로 가게 되기도 한다. 아빠의 단독 범행으로 엄마 역시 살해 후 자살 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경우다. 문제는 이 쉼터가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돕는 시설이다보니 아동에 대한 별도 지원이 이뤄지기 어렵다는 점이다.
김미숙 한국아동권리학회 부회장은 “현재는 최초에 어느 부처에서 (피해자를) 발견했는지에 따라 여가부, 복지부, 법무부 시설로 보내지는 식”이라며 “다른 것보다 아동의 상태와 가정 상황까지 모두 고려해 아동에 대한 보호 지원을 결정하는 것이 매뉴얼로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부처별로 분절된 지원 정책이 진행되다 보니 아동에게 가장 필요한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민소영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도 “피해 아동을 보호·지원하는 공적 전달체계가 범부처 간 분절된 상태”라면서 “결국 살해 후 자살 사건의 게이트키퍼 역할을 하는 기관이 ‘아동에게 최적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곳이 어디인가’라는 관점을 갖고 피해 아동을 연계해주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헌 김유나 기자 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