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덮는 것은 은혜가 아니다

입력 2024-11-07 03:06
지금 한국교회엔 거룩과 겸손의 영성이 시급하다. 지난 2021년 10월 미국 콜로라도주 콜로라도스프링스에서 열린 ‘글로벌 하비스트 서밋’ 리더들이 거룩의 회복을 위해 뜨겁게 기도하고 있다. 황성주 회장 제공

나는 감히 거룩이라는 용어를 언급할 수 없는 사람이다. 병원과 기업을 운영하면서 법적으로 두 번이나 검찰 기소를 당해 선고유예, 기소유예의 판결을 받은 적이 있는 죄인이다. 무지의 결과였고 억울한 면이 있었으나 현행법을 위반한 것은 틀림없었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이고 하나님 앞에 서면 날마다 가슴을 치며 애통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다.

아직도 세상의 영향력을 극복하지 못하는 연약함과 죄성, 견고하지 못한 믿음을 한탄하게 된다. 성경을 가르치지만 말씀대로 살지 못하니 영적 사기꾼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고 폭포수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고도 제 역할을 못 하니 죄인의 괴수요, 세계 선교와 영혼 구원을 외치면서 가장 가까운 이웃조차 사랑하지 못할 때가 있으니 어찌 위선자가 아니겠는가. 그래도 강권적인 주님의 은혜로 오늘까지 왔으니 그 은혜의 놀라운 파격성을 절감하게 된다.

거룩 겸손 은닉의 원칙

최근 빌리온 소울 하비스트(BST·Billion Soul Harvest)라는 세계적인 운동에 참여하고 섬기면서 핵심리더들과 합의한 사항이 있다. 그것은 Holy(거룩), Humble(겸손), Hidden(은닉)의 3H 원칙인데 이 매력적인 원칙은 많은 글로벌 리더들이 이 운동에 동참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됐고 리더들의 강점을 끌어내는 힘이 되었다.

거룩의 본질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겸손해지고 내가 드러나지 않게 되기에 이른바 3H의 리더십은 하나로 관통한다. 거룩이라는 단어가 신약에서는 온전함, 충만함의 의미로 쓰이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엡 4:13)이라는 표현에서 뜻이 완성된다.

10·27 연합예배와 기도회가 끝난 지금 이 대세를 몰아 한국교회의 모든 역량을 끌어내어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려면 모든 리더들이 3H(거룩·겸손·은닉) 영성으로 무장돼 하나 됨을 이루어야 한다. 거룩은 진실한 회개의 열매로 맺어진다. 사실 한국교회가 회개를 자주 언급하지만 이는 감성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을 두려워해 빛으로 오는 방향성의 문제이다.

어둠을 떨쳐버리고 빛으로 오는 여정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의 말씀은 자백하기만 하면 죄사함을 받는다는 말씀(요일 1:9)을 보완하는 중요한 성경 구절이다.

겸손은 거룩의 얼굴이다. 최근 유명해진 투자 전문가 레이 달리오의 ‘원칙’이라는 책은 나 자신을 깊은 자기성찰로 이끌며 나약한 사고의 틀을 철저히 변화시켰다. 잘 나가던 그가 나이브한 경영으로 부도를 맞고 처절한 성찰 끝에 얻어낸 결론은 ‘나는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극단적 겸손과 철저한 경청이다. 그래서 그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의도된 반대파를 만들어 토론하는 방식을 택한다.

문제를 파악할 땐 급진적 투명성(radical transparency), 해결책을 제시할 땐 급진적 개방성(radical openness)을 모토로 투자정책 회사를 세운 뒤 놀라운 성공을 거두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대부분의 독선은 어두운 밀실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엔 투명성과 개방성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그래서 어둠을 드러내는 투명성과 개방성은 거룩의 핵심 요소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선 자기부정과 진실에 직면할 용기, 즉 십자가의 영성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거룩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있는 그대로 드러낼 용기가 있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죄를 덮으면 어둠이 판친다

최근 한국교회를 짓누르는 것은 한 마디로 거룩의 문제이다. 최근 일어난 어느 교단 지도자의 불륜 논란은 교회는 물론 한국 사회 전반에 큰 충격을 주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건 이후 대사회적 사과도 없고 공개적 회개도 없이 이를 은폐하려는 시도였다. 상처는 그냥 덮으면 곪아 터지게 되고 사소한 염증을 방치하면 패혈증으로 생명을 위협받게 된다. 얼마 전 필자가 섬기는 한 선교단체에서도 이사회 회의록 변조가 큰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누군가에 의해 중요한 기록을 고의로 변조한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이럴 때 항상 등장하는 이슈는 ‘그냥 은혜로 덮고 가자’는 것과 ‘드러내어 바로 잡자’는 두 가지 입장의 대립이다. 그러나 은혜는 회개한 죄인을 품는 것이지 죄를 덮는 것이 아니다. 위장된 평화는 항상 파국을 가져온다.

공의 없는 은혜는 없다. 피 흘림 없는 죄사함은 없다. 은혜라는 이름으로 죄를 덮으면 계속 어둠이 왕 노릇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의식해 죄를 덮는 공동체는 반드시 망하게 돼 있다. 반면에 빛으로 죄를 드러내어 치유하는 공동체는 번성하게 돼 있다. 사실 은혜는 공의를 전제로 부어지는 것이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진리를 배제한 사랑은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거룩의 또 다른 얼굴은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필자는 최근에도 병원 문제로 경찰 조사를 받은 적이 있는데 아랫사람의 실수이지만 양벌규정에 의해 대표자인 병원장도 처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병원에는 대표원장 등 실무자가 있지만 대표자는 실무에 관여하지 않아도 무한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다.

이 일을 통해 충격을 받고 리더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감의 무게를 실감하게 되었다. 과연 내게 부과된 사명과 부르심의 영역에서 무한책임을 느끼고 있는가. 충성스러운 청지기로서 주님의 주되심(Lordship)과 우리의 청지기 신분(Stewardship)을 인정하는 겸손한 종으로 주님 앞에 몸부림치고 있는가.

예수님의 경고 중 가장 무서운 말씀은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7~48)는 구절이다.

영적 리더에게는 거룩 겸손 은닉이라는 기본 덕목 외에 ‘하나님 앞에 무한책임을 지는 태도’가 요구된다. 사실 이 시대의 불행은 느헤미야처럼 공의와 은혜, 사랑과 진리 가운데 치열하게 고뇌하면서 상황을 책임지는 리더가 없다는 것이다. 요즘은 새로운 역할을 덜컥 맡기가 겁난다. 그 이유는 공의로운 심판대 앞에 추궁당할 무한책임 때문이고 서머나 교회에게 주셨던 이 말씀의 부담감 때문이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물론 ‘긍휼은 심판을 이긴다’는 야고보서의 말씀처럼 오늘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은혜로 승리하는 인생길을 뚜벅뚜벅 걷고 있다.

황성주 이롬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