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여행] 은빛 물결치는 산 아래 무르익는 가을

입력 2024-11-07 04:08
가을철 억새로 유명한 충남 홍성군과 보령시 등의 경계에 우뚝한 오서산 정상 너머로 아침해가 솟아오르고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서 충청도 중에 내포(內浦)가 가장 좋은 곳이라고 했다. 내포란 바다가 안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는 충남 예산·당진·서산·홍성 지역의 10개 고을을 말한다. 이 가운데 홍성은 내포 지방의 중심부에 위치한다.

가을날 홍성에서 꼭 찾아봐야 할 곳 가운데 한 곳이 오서산(烏棲山·해발 791m)이다. ‘까마귀 보금자리’라는 이름은 예로부터 까마귀와 까치가 많이 서식한다고 해서 붙었다. 홍성의 남쪽에서 보령·청양과 경계를 이루며 홍성 12경에도 포함돼 있다. 가을이 되면 정상을 중심으로 약 2㎞의 주능선이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로 장관을 이룬다. 정상에는 넓게 전망대가 설치돼 있다. 이곳에 서면 수채화처럼 펼쳐진 서해와 섬, 억새군락이 환상적인 광경을 펼쳐 놓는다. 일출·일몰 때에는 햇빛에 반사된 환상적인 억새의 물결과 낙조를 만끽할 수 있다.

새우젓이 익어가는 광천읍 옹암리 토굴 내부.

오서산 아래 광천읍은 김장철에 찾는 이로 북적인다. 옹암리 토굴 새우젓 덕분이다. 옹암리는 한때 바닷물이 닿던 포구마을이었다. 옹암포가 새우젓 산지로 알려진 것은 고려시대부터다. 조선시대 말에는 서해안 10여개 섬의 배들이 새우를 싣고 옹암포에서 팔기 시작하면서부터 새우젓 장터가 형성됐다. 1970년대 천수만 수심이 낮아지고, 안면도 연륙교가 개통되면서 옹암포구는 폐항됐다.

토굴 새우젓은 한 주민이 폐광 갱도에 보관한 새우젓이 부패하지 않고 잘 숙성된 것을 발견하면서 시작됐다. 새우젓은 기온 14도, 습도 85%가 유지돼야 맛있게 발효된다. 이보다 낮은 기온에서는 발효되지 않고, 높은 기온에서는 부패한다. 이후 주민들은 마을 뒤에 굴을 파서 새우젓 보관용 토굴을 만들었다. 기온과 습도 두 조건을 갖춘 곳이다. 토굴은 저온저장시설이 없었던 시기에 장기간 새우젓 맛을 지속시킬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다. 옹암리 마을에만 40여개의 토굴이 있다. 대부분 폭 1.5m, 높이 1.7m, 길이 100~200m가량이다.

‘광천김’도 유명하다. 바삭하면서 짜지 않고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수출 효자 상품으로 세계인의 식탁에 오르며 입맛을 사로잡은 K푸드의 핵심이 되고 있다.

금마(金馬)면에 있는 철마(鐵馬)산에서도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볼 수 있다. 홍성 출신인 최영 장군이 철마산에서 무예를 연마했고, 그가 타던 말 이름이 금마다. 여기에 전설이 있다. 어린 시절 최영 장군은 인근 철마산에서 애마 금마 타기와 활쏘기를 즐기며 무예를 익혔다. 그는 금마를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에 화살보다 늦으면 목을 베겠다고 한 뒤 큰 은행나무가 있는 들판을 향해 화살을 쏘고 말을 타고 달렸다. 은행나무에 도착한 뒤 화살이 보이지 않아 금마의 목을 베고 말았는데, 그때 그의 귓전을 스치며 화살이 날아왔다. 장군은 성급함에 말을 잃은 것을 슬퍼하며 지금의 금마총 자리에 말을 고이 묻어줬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기미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철마산 봉화대 뒤로 해가 저물고 있다.

철마산에 오르면 먼저 일제강점기 기미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는 3·1공원을 만난다. 항일독립운동을 벌였던 독립운동가들의 혼이 숨 쉬는 곳이다.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184명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가 있다. 독립운동가들은 당시 철마산 봉화대에 봉화를 올리고 만세운동을 벌였다. 지역주민들은 매년 순국선열들을 생각하며 새해를 의미있는 철마산에서 특별하게 맞는다. ‘금마 철마산 해돋이 행사’가 이곳에서 개최된다.

홍성의 북쪽 용봉산에도 최영 장군이 소년 시절 활을 쏘며 무예를 연마하던 곳이 있다. 최영 장군 활터다. 이곳에서 활을 쏘면 홍북면 노은리에 있는 최영 장군의 생가 마을 뒷산까지 화살이 날아가 봉우리에 앉아 있는 암탉을 맞혔다고 한다. 그 산이 ‘닭재산’이다.

핑크뮬리 너머 복원된 고암 이응노 생가.

용봉산에서 대한민국 미술사에 큰 업적을 남긴 고암 이응노 화백의 생가와 기념관이 보인다. 이응노 화백은 1904년 홍성에서 태어나 1989년 파리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온 삶을 그림으로 채웠다. 생가기념관은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본 전시관, 야외전시장, 다목적실, 복원된 생가, 연지공원, 북카페 등을 갖추고 있으며, 작품 관람과 크고 작은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생가는 그가 남긴 고향집 스케치 ‘수양버들이 늘어진 사이로 옛집의 기역자 모습이 보이고’라는 글을 토대로 2010년 안채와 헛간채를 갖춰 기역자로 복원됐다. 초가지붕의 생가 앞에 핑크뮬리와 팜파스 억새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여행메모
서해선 복선전철 개통으로 접근 편리… 남당항 먹거리·즐길거리 풍성

경기도 서화성역에서 홍성역까지 이어지는 90㎞ 구간의 서해선 복선전철이 지난 2일 개통돼 대중교통을 이용한 접근이 더 편리해졌다. 중간 정차역은 합덕(당진), 아산 인주(아산), 안중(평택), 향남(화성), 화성시청이다. 이 구간엔 시속 150㎞급 ITX-마음 열차가 하루 8회(상·하행 각 4회) 운행되며 약 1시간 소요된다. 운임은 어른 기준 8500원. 미개통인 수도권 전철 원시역~서화성 구간은 열차 운행과 연동해 무료 셔틀버스가 운행된다.

수도권에서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광천나들목으로 빠지면 광천읍에 쉽게 도착할 수 있다. 서울 용산역에서 장항선을 이용하면 광천역까지 2시간 10분가량 걸린다. 광천 곳곳에 자리 잡은 젓갈정식 식당에서는 꼴뚜기젓, 오징어젓, 낙지젓, 새우젓, 어리굴젓 등 다양한 젓갈을 한 번에 맛볼 수 있다. 입맛에 맞는 젓갈 구매도 가능하다.

남당항 네트어드벤처 앞 트릭아트존.

남당항 대하도 빼놓을 수 없다. 9-11월이 제철인 대하는 풍부한 미네랄과 키토산, 쫄깃한 식감을 자랑한다. 화려한 빛과 음악이 어우러진 야간 음악분수쇼를 펼치는 남당항해양분수공원과 신기하고 재미있는 사진을 연출할 수 있는 트릭아트존, 서해안을 배경으로 색색의 그물 위에서 뛰놀며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네트어드벤처도 인기다.



홍성=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