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한국으로 올 때 잠깐 머물던 공항이 있었다. 미국에서 제일 큰 주, 무려 전 국토의 5분의 1이나 되는 땅이다. 늘 크다고 생각했던 텍사스주의 두 배나 되는 땅이다. 또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세계의 꼭대기 에베레스트산을 정복한 고상돈 등산인이 도전했다가 동료와 함께 추락해 목숨을 잃은 매킨리산(6194m)이 버티고 있는 바로 알래스카주이다. 그 이름 자체가 ‘넓은 땅’이라는 뜻을 가진 북극과 가까운 사시사철 흰눈이 쌓인 미국의 마지막 개척지이다. 근래 잠깐 이곳을 둘러보며 기후 온난화로 인해 변화된 환경을 마주하며 많은 생각을 했다.
이 땅을 당시 윌리엄 H 수어드 미 국무장관이 갖은 비난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로부터 1에이커당 2센트씩 총 720만 달러를 주고 사들이기로 계약하자 미국 조야에서도 쓸모없는 얼음 덩어리를 사는 데 귀한 예산을 낭비한다며 비난이 몹시 심했다. 심지어 그 땅을 ‘수어드의 아이스박스’라고 빈정대기도 했다. 그러나 수어드 장관은 나라의 앞날을 생각해 뜻을 굽히지 않고 사들였다. 그것이 160여 년 전인 1867년의 일이다.
오래전 미 켄터키주 바드스타운에 있는 센요셉대학은 교수 한 명을 면직했다. 미국 동서를 잇는 철도가 생기기 훨씬 전, “서부로 달리는 철도가 필요하며 언젠가는 그 꿈이 이뤄지리라”는 내용의 미래를 내다보는 글을 조그만 팸플릿에 실었기 때문이다. 그 글을 읽은 이 대학 이사회는 그 교수를 ‘정신 이상자’라는 이유로 교수직을 떠나게 했다.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면 기차가 서부까지 어떻게 갈 수 있으며 그 생각을 글로 쓸 수 있겠느냐며 ‘비정상’이라고 했다. 이 일화는 한국의 경부고속도로 건설 초창기를 떠오르게 한다.
역사를 뒤돌아보면 소수의 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옳은 일은 언제나 숫자에 의해서 측정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다수의 의견에 맞선 소수의 생각이 그 진가가 확인될 때가 종종 있었다. 특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는 불변한 채 머물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사과가 열리니까 사과나무” “사과나무니까 사과가 열린다”라는 두 의견 중 무엇이 다를까. 많은 이들은 어느 것이 옳다는 여론이 많으면 이를 진리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 자체가 진리이면 어느 누가, 얼마만큼의 숫자가 진리라고 결정하지 않아도 진리는 진리로 머물며 언젠가는 밝혀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인간이 범하기 쉬운 일 중 하나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일과 그 자체가 진리임을 인정, 확인하는 일을 구별치 못하는 것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다수와 소수의 주장이 ‘사실’로 확인되기 전까지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시간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온 후 앞으로 가서 살게 될 가나안 땅이 어떤지 살펴보려고 정탐꾼을 보냈다.(민 13:1,2; 신 1:22~33) 각 지파에서 한 명씩이니까 모두 열두 명이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리라고 약속한 땅을 두루 살피고 돌아와서 경험한 바를 보고했다. 내용은 둘로 갈라졌다. 계속 진군해 점령하자는 의견은 두 사람, 적의 실력이 우리보다 훨씬 강해 아예 포기하자는 주장은 열 사람이었다. 다섯 배나 많은, 전투를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는 게 상식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이 공식만이 언제 어디서나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음을 증언한다. 여호수아와 갈렙. 정탐 후 가나안으로 향하자고 주장한 두 사람이다. 이 두 사람이나 나머지 열 사람 모두 그 본토인들의 상황을 살핀 결과는 같았지만 전략은 달랐다. 두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BC 1913)을 믿었다.(BC 1450) 무려 460여년 후의 사건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이를 믿은 갈렙은 여호수아처럼 모세의 후계자는 아니었으나 주님 앞에서는 칭찬을 받았을 테다.
림택권 웨이크신학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