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는 가을의 상징이다. 가을꽃과 단풍의 화려한 빛깔에는 못 미치지만 늦가을까지 남아 전국 산천을 억새 천국으로 만들어 낸다. 바라보는 위치와 시간에 따라 억새의 색은 달라진다. 해를 마주 보는 억새는 은빛으로 빛나고, 석양의 억새는 황금빛으로 부서진다. 선선한 가을바람에 물결치는 억새 속을 거닐면 만추의 서정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투구 감춘 봉우리’의 억새 풍경
경북 경주에서 억새 장관으로 유명세를 타는 곳은 경주국립공원에 속하는 동대봉산 무장봉(해발 624m)이다. 봉우리 이름은 ‘투구를 감추다’라는 의미다. 삼국통일 후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평화의 시대를 기원하며 투구와 무기를 무장봉 아래 골짜기에다 숨겼다고 삼국유사에 전해진다.
멋진 억새 풍경을 자랑하지만 2년 동안 출입이 통제됐다. 2022년 9월 힌남노 태풍이 몰고 온 폭우에 탐방로가 유실되돼 등산로가 폐쇄된 뒤 복구작업을 마치고 지난 5월 다시 열렸다.
산행 들머리인 암곡동 주차장에서 무장봉 정상까지는 5.7㎞. 길이 험하지 않아 편하게 오를 수 있다. 무장봉 정상을 하얗게 뒤덮은 억새군락은 148만㎡(44만평)로 강원도 정선군 민둥산의 2배가 넘는 규모다. 정상석 바로 앞 전망대에 서면 드넓은 은빛 억새 물결이 눈과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와 드라마 ‘선덕여왕’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억새 감상은 12월 초순까지 가능하다.
이곳 억새군락지는 원래 목장이었다. 1970년대 동양그룹의 오리온목장으로 출발해 80년대 비업무용 토지 강제 매각 조치에 따라 모 축산회사로 넘어갔다. 이 회사가 96년까지 목장으로 운영하다 문을 닫은 이후 관리가 되지 않으면서 억새바다로 변했다.
공룡 등뼈 위 황금빛 물결
가을철 억새 풍경에서 빠질 수 없는 곳이 울산 울주군 ‘영남알프스’다. 울산과 경남 양산·밀양, 경북 청도·경주의 경계를 이루는 1000m 이상 고봉 7개로 연결된 산군으로, 수려한 산세와 풍광이 유럽의 알프스와 견줄 만하다고 해 얻은 이름이다.
신불산 정상에 서면 영남알프스의 거대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신불재를 거쳐 영축산으로 이어지는 일대 4㎞ 구간 평탄한 능선은 거대한 억새밭이다. 석양을 받은 황금빛 억새가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그 사이 탐방로는 억새바다 물결 위를 건너는 구름다리 같다.
왼쪽으로 ‘칼바위’로 불리는 신불산 공룡능선이 이어져 있다. 공룡의 등뼈처럼 뾰족뾰족 치솟은 바위가 살아 있는 공룡처럼 꿈틀대는 듯하다.
신불산 반대편 바람도 쉬어간다는 해발 900m의 간월재도 억새로 이름나 있다. 광활한 억새평원이 눈부신 가을 햇빛에 반짝이며 파도로 일렁인다. 옛날 인근 주민이 지붕을 이기 위해 억새를 베어 지게에 지고 내려갔던 삶의 터다.
무등산 능선 억새의 군무
광주 사람들에게 무등산은 ‘어머니의 산’이다. 그만큼 푸근하고 따스해서다. 가을에 이 따사로운 능선에 억새가 지천으로 깔린다. 무등산 9부 능선에 위치한 장불재 일대가 명소다. 중머리재·중봉·백마능선·꼬막재 등에서도 억새의 군무가 펼쳐진다. 장불재에서 보면 억새와 어우러진 입석대·서석대 주상절리 풍경에 눈이 번쩍 뜨인다. 은빛 물결 너머 우뚝 솟은 바위의 기세가 당당하다.
서석대에 올라서면 정상으로 이어지는 길에 억새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공군부대 주둔으로 출입이 통제됐던 광주 무등산 정상이 지난해 10월 상시 개방됐다. 정상 삼봉인 천왕봉(1187m), 지왕봉(1175m), 인왕봉(1140m) 가운데 인왕봉이 열렸다. 서석대 주상절리에서 인왕봉 전망대까지 갔다가 내려간다.
‘오름의 여왕’에서 보는 은빛 춤사위
가을에 제주도를 찾는다면 서귀포시 표선면의 따라비오름(342m)을 찾아보자. ‘따라비’는 ‘땅의 할애비’라는 뜻의 ‘따애비’에서 유래했다. 400m쯤 떨어진 새끼오름은 따라비의 아들 격이고, 새끼오름과 1㎞가량 거리를 둔 모지오름은 며느리, 모지오름과 330m 거리를 둔 장자오름은 손자에 해당한다고 한다.
정상부에 오르면 굼부리, 즉 분화구 3개를 맞이한다. 말굽 형태로 터진 굼부리를 중심에 두고 두 곳의 굼부리가 쌍으로 맞물려 세 개의 원형분화구와 여섯 개의 봉우리로 이뤄져 있다. 봉우리에 서 큰사슴이오름과 한라산, 성산일출봉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분화구에는 가을의 느낌이 물씬 나는 억새가 바람에 맞춰 하늘하늘 춤을 춘다. 화산폭발 시 용암의 흔적이 만들어낸 부드럽고 아름다운 능선과 어우러져 절경을 빚어낸다. 가을철 제주 오름 368개 중 가장 아름다운 ‘오름의 여왕’으로 불리는 이유다.
글·사진=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