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카카오 김범수 창업자가 SM엔터테인먼트 주가 시세조종 혐의로 구속됐다. 반면 이를 진두지휘한 실무 책임자는 함께 검찰 수사 선상에 올랐지만 ‘리니언시’(자진신고자 감면제도)가 적용돼 처벌을 면했다. 통상 공정거래법에 적용되는 리니언시는 올해부터 자본시장법에 도입됐다. 아랫사람이 리니언시를 통해 모든 책임을 위에 떠넘겼고, 김 창업자는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혔다.
최근 재계에서는 굴지의 대기업 부회장의 총수 협박(?) 사건이 화제에 올랐다. 타의로 일선에서 물러난 부회장이 오너에게 수천억원의 비공식 퇴직금을 요구했다는 게 소문의 요지다. 사실이라면 회장의 전용기까지 마음대로 이용할 만큼 오너에게 신뢰를 받았던 부회장이 서운한 마음을 돈으로 표출한 셈이다.
로열티(충성심) 실종 시대다. 창업주의 시대가 저물고 2, 3세 경영이 시작되면서 말 그대로 가족 같은 신하인 가신(家臣)들도 사라지고 있다.
물론 가신의 시대도 있었다. 오너 대신 구속되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알았던 때가 불과 20여년 전 일이다. 2002년 불법 대선자금 수사 당시 10대 그룹 대부분의 ‘금고지기’들은 검찰의 회유와 협박에도 대선 후보에게 준 불법 자금은 오너의 지시가 아닌 자신의 판단이었다는 믿기 어려운 진술을 고수했다. 당시 삼성의 2인자였던 이학수 부회장을 직접 조사했던 윤석열 대검 중수부 검사는 훗날 “다른 건 모르겠고 주군(이건희 회장)에 대한 충성심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사라지는 현상은 젊은 직원들에게 더 강하다. 모 대기업 인사 담당자는 최근 퇴사처분 당하지 않고 최대한 휴직할 수 있는 기간을 묻는 신입사원의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궁금한 마음에 “집안에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자 의대 증원이 되니 이제라도 수능 준비를 해보려고 한다는 답을 들었다. ‘삼성맨’ ‘현대맨’ 호칭이 사라졌듯 MZ세대에게 ‘좋은 대기업=평생 직장’이란 공식은 사라졌다.
처우가 더 좋은 곳이 있으면 언제든 옮기겠다는 마음을 품고 일하는 직원은 그나마 양반이다. 직장을 다니면서 투잡을 뛰거나, 회사를 활용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다가 적발되는 사례가 감사 때마다 늘고 있다. 한 금융사 CEO는 십수년간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한다고 생각한 모 부장이 알고 보니 자신의 아내 명의 회사와 회사 전산관리 계약을 맺고 잇속을 챙기고 있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문제의 직원은 회사 징계 절차 진행 와중에 사표를 던지고 타사로 이직했다. 모 대기업 계열사와 매년 행사를 진행하는 한 기획사 대표는 뒷돈은 물론이고 자신의 가족 해외여행 계획까지 짜라는 대기업 직원의 갑질에 울분을 토하며 “저런 직원에게 월급을 갖다 바치는 회사가 불쌍하다”고 전했다.
20세기 한국 경제를 선진국 대열에 올려놓은 것은 ‘사람’이었다. 중동의 사막에서 모래바람을 맞으며 일한 건설노동자든, 회사 연구실을 집 삼아 신기술을 이뤄낸 개발자든 월등한 노동력이 경제 성장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그 노동력의 근간은 회사와 국가에 대한 로열티였다.
불행하게도 그런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오너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는 임원을, 야근수당 없이 밤샘근무를 하는 직원을 기대해선 안 된다. 회사를 위해 나 하나 몸 바치면 온 가족이 편히 살 수 있는 시대도 아니니 이를 강요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 경제와 그 근간이 되는 기업의 성장 동력은 무엇으로 삼아야 할까. 로열티를 학습한 인공지능(AI)일까. 아니면 미국처럼 해고가 자유로운 노동 유연성 사회가 오면 기업의 경쟁력이 강화될까. 풀기 어려운 숙제다.
이성규 산업1부장 zhibag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