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신 7:6~8)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 따로 떼어 놓은 구별된 백성, 성민이 되었다. 또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 택함받아 그분의 특별한 소유가 된 ‘기업의 백성’이 됐다. 그렇게 된 것은 이스라엘이 수효가 많거나 공적이 많아서가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여기에 쓰인 히브리어 ‘하사크’(hasag·남자가 여자에게 연정을 품는 것)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특별한 사랑을 베푸시는가. 그것은 이스라엘의 강함 때문이 아니라 연약함 때문이다. 잘남 때문이 아니라 못남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노예살이 신세였다. 고대 근동 지방을 떠돌아다니는 ‘합비루’ 출신이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하고 못난 자식에게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쏟는 부모처럼 이스라엘을 제국의 굴레에서 속량하시어 자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구원으로 속량된 거룩한 백성이기에 이스라엘이 응답해야 할 길은 자명하다. 먼저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과 성실하심을 깊이 깨닫는 것이다. 단순히 머리로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온 존재로 체험해 깨달아야 한다. 깨달음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사랑과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평화의 계명을 지켜나가는 것이 ‘성별’되고 ‘속량’받은 이스라엘의 도리다. 또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길이기도 하다.
오늘날 영성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관상(contemplation)’과 ‘활동(action)’의 온전한 통합이 구원의 길인 것이다. ‘관상’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랑 관계의 경험이자 상태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들이 말없이 사랑 어린 눈빛만으로도 충만한 사랑을 경험하듯이,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를 극진한 사랑으로 바라보며 그 사랑 안에 머무는 경험이다.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러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극진하고 심오한 사랑의 경험을 삶과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서로를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요 15:12) 그 사랑은 원수마저 보듬는 사랑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민족과 인종, 남과 여, 주인과 노예의 차이를 훌쩍 뛰어넘어 한몸 된 공동체를 이루는 넉넉한 사랑이다.
종교개혁은 그 부드럽고 생동감 넘치는 사랑이 중세 교회의 굳어버린 권력과 타락한 욕망에 포로가 되었을 때 터져 나온 해방의 사건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로 다시 초대받는다. 그 사랑의 능력으로 이 시대의 복잡하고 위태로운 모순들을 품어가는 행동으로 나서라는 부름을 들고 있다. 그 사랑의 초대와 십자가를 짊어지는 행동으로의 부름에 온전히 응답하는 길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종교개혁을 기억하는 방식일 것이다.
이진권 목사(새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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