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로 적극 개척한 포르투갈·스페인
대항해시대 주역으로 세계화 견인
새로운 길은 항상 역사 변화 이끌어
북극항로 어떤 기회 다가올지 궁금
대항해시대 주역으로 세계화 견인
새로운 길은 항상 역사 변화 이끌어
북극항로 어떤 기회 다가올지 궁금
해양은 인간에게 해상 운송이라는 큰 혜택을 제공하지만 늘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다. 세계해운협의회 자료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23년까지 16년 동안 연평균 1480개의 컨테이너가 바다로 유실됐다. 거의 우리의 관심 밖인 이 사고들이 때로는 해양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기도 한다.
1990년 5월 27일 한국에서 미국으로 향하던 컨테이너선 한사 캐리어호가 폭풍을 만나 컨테이너 21개가 유실되고 알래스카 남쪽 먼바다에 나이키 운동화 약 6만1000개가 쏟아져 나왔다. 1992년 1월 10일 홍콩을 떠나 미국으로 향하던 컨테이너선 에버그린 에버 로렐호는 날짜변경선 부근에서 컨테이너 12개가 배 밖으로 밀려나는 사고를 당했다. 노란색 고무 오리를 포함한 목욕 장난감 약 2만9000개가 흩어졌다. 시애틀의 해양학자 두 명이 이들의 이동 경로를 찾는 일에 매달리게 된다. 운동화는 사고 6개월 후 워싱턴주 북쪽 해안에 도착하기 시작해 이듬해 1월 밴쿠버섬 앞바다, 1992년에는 하와이까지 도착했다. 고무 오리는 사고 후 10개월 만에 알래스카 연안에서 목격되기 시작했고, 2000년 이후 북미 동해안에서도 회수됐다. 수년간 공해와 북극해 얼음을 뚫고 놀라운 여정을 계속한 것이다. 자료를 수집·분석한 두 해양학자는 물에 잠긴 운동화는 해류를 따라, 물 위에 떠다니던 장난감은 해류와 바람에 밀려 이동한 것으로 설명했다. 조그마한 물건들이지만 해수면에서의 이동은 해류와 바람의 영향이 절대적임을 의미한다. 선박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해류는 항로를 안내하는 자연의 손길이다.
대양에서 표층 해류는 바람에 의해 발생하고 유지된다. 지구 대기의 바람은 적도에서 위도 30도 사이에서는 서쪽으로 부는 무역풍, 위도 30도에서 60도 사이에서는 동쪽으로 부는 편서풍이 탁월하다. 따라서 표층 해류는 무역풍 해역에서 서쪽으로, 편서풍 해역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북태평양에서는 이들을 각각 북적도 해류와 북태평양 해류라고 부른다. 이 해류들은 서쪽과 동쪽 끝 육지 경계에 접근하면 해안선을 따라 남북 방향으로 흐르는 해류로 바뀌게 된다. 서쪽 경계류가 동쪽 경계류보다 더 좁고, 깊고, 빠르게 흐른다. 서쪽 경계류는 초속 2~4m지만 동쪽 경계류 유속은 초당 10㎝ 정도에 불과하다. 서쪽의 강한 해류를 서안경계류라 하고 북태평양에서는 구로시오, 북대서양에서는 멕시코만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남반구에서도 무역풍과 편서풍 해역에는 각각 서향류와 동향류가 있고 서안경계류가 강하다. 북반구와 크게 다른 점은 남반구 편서풍 해역에는 육지 장애물이 없어 해류는 남극대륙 주위를 순환하게 된다. 지구상 가장 거대한 남극순환류다. 이 해류들과 바람 형태가 항로를 안내해 대항해시대 세계사 전개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해류가 세계사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대항해시대부터다. 용어 자체가 이를 웅변한다. 대항해시대 주역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세계화 과정, 즉 식민지 건설은 항로 개척 과정과 궤를 같이한다. 포르투갈의 ‘볼타 두 마르(Volta do mar)’와 스페인의 ‘마닐라 갤리온 무역’이 대표적인 예다. ‘바다에서 돌아오다’라는 뜻의 볼타 두 마르는 15세기 초반 포르투갈 항해자들이 찾아낸 고향길 찾는 방법이었다. 최초 적용은 이베리아반도에서 카나리아 해류를 이용해 아프리카 서해안 남쪽으로 가고, 무역풍과 편서풍을 받아 대서양 동쪽 섬들에 이르며, 포르투갈 해류를 타고 포르투갈로 돌아가는 항로다.
포르투갈이 인도양을 건너 동쪽으로 해양제국을 만들고 있을 때 스페인은 아메리카 식민지로부터 태평양을 횡단하는 서쪽 항로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1565년 2월 필리핀 정복을 위한 스페인 탐험대가 멕시코 아카풀코에서 태평양을 건너 마닐라에 도착하고, 같은 해 필리핀에서 멕시코로 돌아가는 귀환 항로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에게 대양은 꿈에도 없었던 조선 명종 때 일이다. 멕시코에서 무역풍과 북적도 해류를 이용해 필리핀으로 가고 필리핀에서 구로시오, 편서풍과 북태평양 해류, 그리고 캘리포니아 해류를 이용해 멕시코로 이동하는 바닷길이 열린 것이다. 이후 250년간 계속된 갤리온 무역에서 동아시아 향신료, 비단, 도자기 등과 아메리카 은이 오고 갔다. 또한 아메리카의 옥수수, 감자, 땅콩 등이 마닐라를 거쳐 동아시아로 퍼지게 된다. 세계 경제뿐만 아니라 농업, 생태계, 문화사에서도 중대한 사건이 된 갤리온 무역의 근간에 갤리온 항로가 있다. 아시아, 아메리카, 유럽을 무역으로 연결한 세계화 탄생 배경에 해류 이용이 있음을 의미한다.
유럽 산업화와 미국 노예제도의 뿌리가 된 유럽, 아메리카, 아프리카 사이의 대서양 삼각무역과 네덜란드 황금기를 가져온 인도양 브라우어르 항로에서도 이들의 배경은 해류와 바람이었다. 영국 웨스트민스터대에서 과학 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는 루이스 다트넬 교수는 저서 ‘오리진’에서 세계 역사의 궁극적인 원인을 넓은 시공간 관점으로 지구 자체에서 찾았다. 해양탐험 시대를 지구 대기와 해양 순환계라는 맥락에서 보고, 해류와 바람 형태의 이해로부터 여러 무역로와 해양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해양이 인간에게 준 혜택인 해상 운송에 경험하지 않았던 새로운 길이 열리는 중이다. 기후변화에 따른 북극해 얼음 감소로 북극항로가 주목받고 있다. 동토의 땅 시베리아가 품고 있는 에너지와 광물 자원은 이미 북극항로 관련 키워드로 함께한다. 차가운 해상 운송로가 향후 세계사 흐름에 무슨 영향을 줄지, 우리에게 어떤 기회로 다가올지 궁금하기만 하다. 새로운 항로는 항상 세계 역사에 변곡점의 시작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재학 한국해양한림원 석학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