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 A씨는 현재 거주 중인 오피스텔 1층에 편의점이 있지만 입구에 턱이 있어 이용하지 못한다. 장애가 있는 배융호 한국환경건축연구원 이사도 집 근처 편의점이 3곳이나 있지만 휠체어로 이용할 수 없는 상태다. 이들은 2018년 4월 장애인 접근권 보장을 위해 ‘1층이 있는 삶’ 소송을 시작했다. 배 이사는 23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휠체어 사용자들이 헤매는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정부 책임을 물어 달라”고 말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이숙연 대법관)는 이날 A씨 등 3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장애인 접근권’ 국가배상 소송 공개변론을 열었다. 조희대 대법원장 취임 후 첫 전합 공개변론이다.
재판의 쟁점은 정부가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 의무가 있는 소규모 소매점’의 범위를 확대하지 않고 시행령을 방치한 것이 위법한지, 나아가 정부에 손해배상 책임도 있는지다. 옛 ‘장애인 등 편의법’ 시행령은 편의점 등 소규모 소매점은 바닥면적 합계 300㎡ 이상일 때만 경사로 등 설치 의무를 규정했다. 1998년 시행돼 2022년까지 24년간 유지됐다. 하지만 바닥면적 합계가 300㎡를 넘는 편의점은 3%(2019년 기준)에 그쳐 장애인 접근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많았다.
A씨 등이 편의점 운영사 GS리테일 및 정부 등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1심은 2022년 2월 GS리테일이 직영 편의점에 이동식 경사로 등을 구비하라고 판결했다. 다만 “정부에 시행령 개정 의무가 있다고 볼 수 없다”며 정부 배상 책임은 기각했다. 이후 정부는 2022년 4월 ‘바닥면적 합계 50㎡’로 시행령 적용 범위를 넓혔다.
원고들은 정부가 부실한 시행령을 장기간 방치해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고 거듭 주장했고, 대법원 공개변론으로 이어졌다. 휠체어를 타고 출석한 배 이사는 “얼마 전에도 점심을 먹으려 30분을 헤매다가 (접근시설이 설치된 음식점을) 한 곳도 찾지 못해 점심을 굶고 회의에 들어갔다”며 “소매점을 이용할 수 없어 일상이 어렵다”고 했다.
반면 정부 측 대리인은 “소매점 대신 온라인 쇼핑몰이나 장애인 편의시설이 있는 대형마트를 이용하는 등 소매점 접근권은 다른 권리에 비해 대체수단이 많다”며 “소상공인 부담 등을 고려해 점진적 변화가 불가피했다”고 말했다.
오경미 대법관은 정부 측에 “온라인 주문으로 대체 가능하다는 건 집에만 있으면서 온라인 활동만 하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 대법원장은 “(편의시설 설치 의무 소매점을) 전체의 5%로도 안 해놓고 정부가 시행령으로 할 바를 다했다는 건 도저히 이치에 안 맞는 것 아닌가”라고 되묻기도 했다.
이번 사건의 판결은 정부의 부작위(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음) 책임이 문제가 되는 다른 영역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어 결과에 따라 큰 파장이 예상된다. 대법원 선고는 대법관들의 최종 토론을 거쳐 2~4개월 이내 이뤄질 전망이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