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물결 속 느릿느릿, 문광저수지
충북 괴산의 은행나무숲은 문광면 문광저수지(양곡저수지)에서 만난다. 400m 은행나무길은 1979년 자전거를 타고 묘목장사를 하던 한 주민이 마을 주민들을 위해 은행나무 300그루를 기증한 것으로 시작됐다. 주변 농지에 물을 대는 평범한 시골 저수지 옆을 지나는 마을길에 은행나무를 심어 전국 각지에서 찾는 아름다운 황금빛 은행나무길로 변모시켰다.
가을날 거울처럼 잔잔한 저수지 수면에 데칼코마니로 드리운 은행나무의 노란빛 반영과 야트막한 산자락의 모습이 장관이다. 이른 아침 저수지 물안개가 몽글몽글 피어나 은행나무길과 어우러지며 자아내는 풍경은 서정적이면서 몽환적이다. 해가 저물면 조명을 받아 황금빛이 붉은빛으로 바뀐다.
은행나무길 바로 옆에는 소금의 역사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소금문화관’과 염전 체험장 등을 갖춘 소금랜드가 있다. 소금랜드의 데크길, 저수지 둘레 생태체험길인 에코로드 등을 따라 걸을 수 있다.
고택 옆 노란 터널, 장현마을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현마을은 국내 최대 은행나무 군락지 중 하나다. 마을 곳곳에서 자라는 은행나무가 3000여 그루에 달한다. 옛날부터 은행나무가 많았던 데다 은행 열매로 수익을 얻기 위해 약 50년 전부터 은행나무를 심으며 은행마을로 불리게 됐다.
이 마을 은행나무는 10월 중순부터 노랗게 물들기 시작해 11월 초까지 황금색 향연을 펼친다. 가장 빼어난 풍경을 자랑하는 곳은 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신경섭 가옥이다. 옛 향기 넘치는 고택 주변을 100년 넘은 거목이 에워싸고 있다. 대문 앞 수나무는 수령 500년을 넘었다고 한다. 고택 마당에서 담장 너머 뻗어 나온 은행나무 가지와 도로 건너편 은행나무가 맞닿아 노란색 터널을 만든다. 그 아래 흩날린 은행잎이 황금 카펫을 펼쳐놓는다.
15m 높이 노란 세상, 도리은행마을
경북 경주시 도리마을에 은행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은 50여 년 전이다. 임업협동조합 시험장에서 근무하던 마을 사람이 가로수로 팔기 위해 은행나무 묘목을 심었는데 반백년 세월 동안 자라 높이 15m의 노란 세상을 펼쳐놓고 있다.
마을 안쪽 가장 큰 숲의 중간쯤에 나무의 간격이 약간 넓은 곳이 있다. 양옆으로 은행나무 기사단처럼 도열해 서 있고, 그 아래 노란 황금빛 양탄자가 깔린 듯하다. 최고의 포토존이다. 연인·가족 등의 카메라가 쉼 없이 찰칵거린다.
강동면 왕신리 운곡서원(雲谷書院)도 가을에 인기다. 서원보다 부속건물인 유연정(悠然亭) 뒤뜰에 우뚝 서 있는 수령 400년 남짓의 은행나무 노거수가 주인공이다. 높이 30m, 둘레 5.3m로 근사한 수형을 지닌 은행나무의 나뭇잎이 오리발을 닮았고 가지가 오리 다리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서 ‘압각수’(鴨脚樹)라고 한다. 유연정 지붕 기왓골에 황금빛 오리발처럼 내려앉은 은행잎이 운치를 더한다.
노란 융단에 담긴 밀양 선비의 기품
경남 밀양에서 은행나무 단풍으로 인기를 끄는 곳 중 하나가 밀양강변 언덕에 자리한 금시당·백곡재다. 금시교 인근 주차장에서 보면 큰 은행나무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낮은 돌계단을 올라 대문 안으로 들어선 뒤 오른쪽 협문으로 나가면 널찍한 마당이 펼쳐진다.
마당의 저편 끝 모서리에 하늘 가득히 퍼져서 자라난 은행나무가 서 있다. 460여 년 자란 나무의 풍채가 일체의 공간을 뒤덮어버린다. 1566년 조선 중기 문신이었던 이광진 선생이 직접 심었다고 전해진다.
금시당 건너편은 ‘암새들’이다. 이곳에도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아기자기한 은행나무숲이 있다. ‘용평동 265-2’를 찾아가면 된다.
이곳에서 밀양강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 만나는 월연정과 오연정의 키 큰 은행나무도 빼놓을 수 없다.
글·사진=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