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섬유로 만든 괴생명체·밀가루 묻힌 튀김 꽃… 진화하는 창작물

입력 2024-10-23 04:09
아니카 이는 기술과 생물, 감각을 연결하는 실험적인 작업을 지속한다. 방산충 연작 전시 전경.

밀가루 묻혀 튀긴 꽃을 작품이라고 내놓는 기발한 발상의 현대미술가 아니카 이(53)가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에서 전시를 하고 있다. 세계를 무대로 뛰는 1.5세 한인 작가의 아시아 첫 미술관 개인전이다.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이라는 제목으로 지난 10여 년간 제작된 작품 33점과 함께 신작을 내놓았는데, 마르지 않는 창작 정신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어느 것 하나 ‘자기 복제’가 없이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냄새, 박테리아, 균류, 비누, 효모 등을 사용해 시각 외에도 후각, 미각 등 다양한 감각을 건드리는 아니카 이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인간중심주의에 비판과 성찰이다.

'생물오손 조각' 연작.

부조 회화처럼 내놓았던 튀긴 꽃은 이번 신작에서는 거대한 조각으로 변신했다. 튀긴 꽃은 조형물에 다닥다닥 붙어 괴생물체를 연상시킨다. 몸체 중간에 장기처럼 붙은 둥근 실린더가 그런 느낌을 고조시킨다. 선박의 바닥에 붙어사는 따개비에서 영감을 얻은 이 조각은 인간이 만든 인공물에 자연물이 침투하는 현상에 착안했다. 그래서 ‘생물오손(汚損) 조각’이라 명명한 이 조각은 시간이 지나면 부패해 시큼한 냄새를 풍긴다. 이 작품이 보여주듯 작가는 균류, 해조류 등 비인간 지능을 탐구한다. 스코비 효모가 스스로 크기를 키운 콤부차 조각, 장내 미생물 균의 복잡성을 탐구하는 ‘공생적인 빵’ 등이 그렇다.

'공생적인 빵'.

초기 대표작인 ‘방역텐트’(2015) 연작은 방역 텐트를 연상시키는 비닐 텐트에 생물 재해 표지를 닮은 패턴과 냄새나 촉감 등 감각과 연결된 오브제가 놓인 설치 작품이다. 2014년 서아프리카 에블라 유행 당시 사람들이 느낀 전염병에 대한 공포와 편견에서 착안했지만, 전 지구적인 코로나19를 거친 지금 더 설득력 있는 작업이 됐다. 인간이 자연의 영역을 침범하며 자연의 복수처럼 겪게 된 코로나19는 인간만이 지구의 주인이 아니라는 자명한 진리를 깨닫게 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닌 비인간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생물에서 기계로 확장하며 유기체 같은 이미지의 키네틱 조각을 탄생시켰다. 방산충 연작은 5억 년 전 캄브리아기에 처음 등장한 단세포 동물성 플랑크톤인 방산충에서 영감을 얻었다. 광섬유로 만든 몸체에 달린 촉수가 먹이를 잡기 위해 손을 뻗듯 움직이는 모습은 아름다우면서도 섬뜩하다. 내부 실린더의 상하 운동을 통해 몸이 아코디언처럼 부풀며 숨 쉬는 듯한 조각을 만들어낸 것이다.

작가는 ‘기계의 생물화’ 개념을 제시하는데, 이는 마침내 궁극적이고 도발적인 질문으로 나아간다. ‘내가 죽은 이후에도 작품은 계속될 수 있을까’라며 지금껏 누구도 던지지 않은 물음을 던진다. 지난 10여 년 간 생산한 작업물을 데이터로 삼아 작가의 ‘디지털 쌍둥이’가 제작한 신작 영상 ‘산호 가지는 달빛을 길어 올린다’는 작가란 무엇인가라는 전통적 개념을 송두리채 흔든다.

인문학적 깊이와 틈을 보이지 않는 완성도를 갖췄다. 그러면서 도발적일 정도로 참신하다. 구겐하임미술관 휴고 보스상(2016), 테이트모던 터바인 홀 현대 커미션작가(2021) 등을 거친 작가의 내공이 느껴진다.

글·사진=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