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문화] 공민왕의 양도, 조맹부의 호기응렵도… 조선 너머의 명화들

입력 2024-10-23 04:08
서울 종로구 성북동 간송미술관의 가을 정기전 ‘위창 오세창: 간송컬렉션의 감식과 근역화휘’에 나온 작품들. 고려 공민왕의 ‘양도’. 간송미술관 제공

고려 말 비운의 왕 공민왕은 처음엔 개혁 군주를 지향했다. 원나라 왕실 출신이었지만 자신을 지지해주던 아내 노국 대장공주가 세상을 떠나자 달라졌다. 실의에 빠져 정사를 내팽개치고 노국 대장공주를 애도하는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신하들의 초상화, 진시황 아방궁 등을 그린 고려의 대표 화가 공민왕의 그림은 현재 단 2점만 전해진다. 그중 간송미술관 소장 ‘양도(羊圖·양 그림)’가 모처럼 대중에 공개됐다.

서울 종로구 간송미술관이 마련한 올해 두 번째 정기전 ‘위창 오세창: 간송컬렉션의 감식과 근역화휘’에서다. 이번 전시는 일제강점기 민족 유물 지킴이 간송 전형필(1906∼1962)을 수집으로 이끈 위창 오세창(1864∼1953) 탄생 160주년을 기념해 마련됐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오세창은 서예가이자 수장가, 감식가, 전각가이기도 했다.

이번 전시는 오세창의 컬렉션이었다가 간송의 품에 안긴 작품들을 중심으로 꾸며졌다. 2층이 핵심으로 오세창이 자신의 컬렉션을 엮어서 만든 3종의 ‘근역화휘’ 수록 작품을 엄선했다. 1층은 오세창이 아버지 오경석으로부터 물려받은 천축재 컬렉션과 간송 컬렉션 가운데 오세창이 감식해준 작품들로 구성돼 있다. 오세창이 전형필에게 증정한 44과의 인장도 처음으로 선보인다.

총 52건 108점이 소개되는 이번 전시 최고 볼거리는 근역화휘에 수록된 공민왕의 양 그림일 것이다. 꼼꼼한 필치로 털이 복슬복슬한 양의 특징을 잘 포착했다. 공민왕의 ‘천산대렵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가 그림 일부만 전해지는 것과 달리, 이 그림은 온전히 보존되고 상태도 양호하다. 백인산 대구간송미술관 부관장은 “고려시대 회화는 불화를 제외하고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고려시대 회화의 특징을 유추할 수 있는 귀한 자료”라고 말했다.

원나라 서화가 조맹부 전칭작 ‘호기응렵도(胡騎鷹獵圖)’도 흥미롭다. 말을 타고 들판에 나온 호인(만주족)들의 매사냥 장면을 그렸다. 그런데 정두서미(시작은 못대가리처럼 굵게, 끝은 쥐꼬리처럼 가늘게) 붓질로 처리한 옷주름과 세밀한 필선의 묘사 방식은 문인화의 창시자 조맹부의 회화 세계와 차이가 있다. 따라서 17, 18세기의 중국 후대 화가들이 조맹부의 그림을 모사한 안작(어떤 물건을 속일 목적으로 꾸며 진짜처럼 만듦)이 조선으로 흘러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 그림은 원래 조선 후기 최고 수장가 석농 김광국의 컬렉션을 모은 ‘석농화원’의 별책 ‘해동명화집’에 있었다. 석농화원은 그림과 발문(글)의 세트로 구성돼 있지만 오세창 수집 당시에는 그림만 떨어져나온 상태로 수집됐기에 족자로 제작됐다. 그러던 것이 2022년 간송미술관 측에서 해동명화집을 조사하던 중 나머지 발문이 발견됨에 따라 원래대로 화첩으로 장정한 것이다.

원나라 조맹부 전칭작 '호기응렵도'. 간송미술관 제공

근역화휘는 오세창의 감식안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고려에서 시작해 조선시대 초기 안견과 이상좌, 중기의 홍득구·신익성, 후기의 김득신·김홍도, 말기의 홍세섭·이한복 등 고려부터 근대까지 산수·인물·영모·화훼·사군자 등 다양한 화목을 통해 한국회화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조선 말기 홍세섭의 '진금상축'. 간송미술관 제공

그런데 오세창 컬렉션은 어떻게 간송 컬렉션이 됐을까. 김영욱 간송미술관 전시교육팀장은 “1930년경부터 오세창이 부친의 뒤를 이어 소장한 천죽재 컬렉션을 간송 전형필에게 증정의 방식으로 전한 사실에 미루어보면, 근역화휘 역시 그렇게 증정한 것이 아닌가 짐작이 된다”고 말했다. 1971년 이래 무료 관람 전통을 깨고 처음으로 유료화했다. 성인 5000원. 12월 1일까지.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