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글속 세상] 동토 뚫고 움트는 귀한 생명을 사수하라

입력 2024-10-23 00:48 수정 2024-10-23 09:34
극지연구소 생명과학연구팀의 김문교(왼쪽) 연구원과 장승연 연구원이 지난 8월 6일 노르웨이 스발바르 블룸스트랜드에서 북극 식물종자를 채집하고 있다. 북극에 자생하는 식물들은 뿌리가 얕고 추위와 강한 바람을 견딜 수 있도록 변형돼 있다.

노랑범의귀, 씨범꼬리, 북방황금괭이눈…. 생소하지만 앙증맞은 단어들은 북극에 자생하는 식물을 부르는 이름이다. 땅에 바싹 붙어 자라고, 작은 꽃을 피운다. 북극의 척박한 땅은 이런 보잘것없는 식물들로 생기를 얻는다.

노르웨이 스발바르는 겨울이면 온통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다. 다만 짧은 여름이 오면 얼어붙었던 대지에 생명의 기운이 돋아난다. 사진은 북극에 자생하는 식물들로 ①씨범꼬리, ②북극종꽃나무, ③툰드라별꽃, ④노랑범의귀, ⑤북극황새풀, ⑥북극이끼장구채.

북위 79도에 자리한 노르웨이 스발바르 니알슨 지역에선 전 세계 과학자들이 모여 다양한 극지 연구를 하고 있다. 한국도 지난 2002년부터 이곳에서 북극다산과학기지를 운영 중이다. 지난 8월 6일에 만난 한국해양과학기술원 극지연구소의 생명과학연구팀은 북극다산과학기지에서 10km 떨어진 블룸스트랜드에서 식물을 채집하고 있었다. 작은 종자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지난 8월4일 노르웨이 스발바르 롱위에아르뷔엔에서 순록들이 풀을 뜯고 있다. 북극 식물은 순록을 비롯한 초식 동물의 귀한 먹이로 북극 생태계의 근간이다.

북극에는 꽃식물과 지의류, 이끼류 등이 자생한다. 지의류와 이끼류는 푸른색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 땅 전체를 넓게 덮고 있다. 이들은 눈과 얼음밖에 없는 긴 겨울을 땅속에서 버티다 짧은 여름이 오면 부지런히 움직인다. 짧은 기간에 자라기 때문에 대부분 키가 작다. 열을 보존하기 위해 군락을 이루는 것도 특징이다. 차가운 온도에 적응하기 위해 잎과 줄기를 두꺼운 왁스로 덮기도 한다.

장승연 연구원이 블룸스트랜드, 오시안사스 등에서 채집한 식물을 건조하는 모습. 식물이 썩는 걸 방지하기 위해 건조 작업을 한다.

북극의 식물들은 토양을 보호하고, 동물들에게 먹이와 서식지를 제공하며 생태계를 지탱하고 있다. 탄소를 흡수하고 저장해 기후 조절에도 이바지한다. 하지만 본래 3000여종의 식물이 자라던 북극에 최근 자생식물 종류가 늘고 있다. 지구 온난화 영향으로 남쪽의 온대 식물들이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있어서다. 북극에 터를 잡았던 식물들은 경쟁에서 밀릴 수 있다.

김문교 연구원이 지난 8월 8일 노르웨이 스발바르 니알슨 지역에 자리한 북극다산과학기지에서 채집해온 식물을 분류하고 있다.

여기에다 영구동토층이 녹으면서 토양의 수분 조건이 변하는 중이다. 식물의 뿌리 성장과 영양소 흡수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영구동토층의 자연 냉각환경을 이용하는 스발바르 국제 종자저장고도 위협받고 있다.

지난 8월6일 노르웨이 스발바르 블룸스트랜드에서 극지연구소 박하동 대원이 총을 들고 주변을 살피고 있다. 스발바르에서는 일정 지역을 벗어나 활동하기 위해서는 총을 소지한 대원과 동행해야 한다. 북극곰의 공격에 대비한 행동이다.

북극의 식물들은 동물들과 복잡한 상호작용을 한다. 특정 식물은 초식동물의 중요한 먹이인데, 식물 생장 시기나 분포가 변하면 북극 생태계를 완전히 재편할 수 있다. 이런 변화는 지구 전체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극지연구소 장승연 연구원은 “눈 속에 묻혀 겨울을 보내야 하는 북극 식물의 종자들이 온난화로 눈이 녹고 다시 어는 과정에서 썩거나 죽는 사례를 연구하고 있다. 온난화가 가속하면 북극 생태계는 급속하게 변할 것”이라고 말했다.

니알슨(노르웨이)=글·사진 김지훈 기자 da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