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공격적 비전 선포할 때”

입력 2024-10-21 01:04
국민일보DB

삼성전자를 둘러싼 위기론은 그동안 삼성전자가 세계 일류기업으로 성장한 자양분이었던 주요 경쟁력이 관성에 젖어 약화한 결과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삼성전자와 그룹이 나아갈 명확하고 새로운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동시에 목표 달성을 위해 직원들을 힘 있게 이끌 강한 리더십이 부활해야만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진단이다. 특히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의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선언에 필적할 ‘뉴 삼성 비전’이 나와야만 위기를 조기에 극복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민일보와 만난 5인의 기업 경영·경제학 전문가는 최근 삼성전자가 겪고 있는 위기의 원인을 ‘미래 비전 부재’라고 지목했다. 삼성전자 고유의 경쟁력이 불명확한 미래 목표로 인해 약화됐다는 것이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20일 “과거 고 이건희 회장 체제에서 성공했던 혁신적인 DNA를 이재용 회장이 가져와 현재 삼성전자 상황에 맞춰 재해석하고 승화시켜야 한다”며 “이 회장이 독자적인 신경영 체제를 구축해 삼성전자의 성장을 이끌어야 한다”고 말했다.

고 이건희 회장은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임원 200여명을 불러모아 경영 비전을 발표하며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고 일갈한 바 있다. 시대 변화에 맞춰 변화하지 않으면 영원히 이류로 머물 것이라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이는 삼성전자가 비약적인 성장을 하는 데 기폭제가 됐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인재 확보, 기술 투자, 제품의 다양성과 혁신 등 모든 분야에 적용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현재 이 회장 역시 삼성전자와 그룹 임직원뿐만 아니라 국민까지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제2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내놔야 한다는 조언이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일본 토요타가 대규모 리콜 사태로 최악의 위기에 빠졌을 때 창업주의 손자인 도요다 아키오 CEO가 전면에 나서 사태를 수습했다”면서 “반도체 위기에 대해 전영현 부회장이 사과의 메시지를 냈지만 직원이나 국민 입장에서는 무게감이 덜하다. 이 회장이 직접 위기 극복 방안을 발표하는 것이 더 상징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구 교수는 “엔비디아의 젠슨 황,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 리더들은 팬덤을 가지고 있다”면서 “기업의 경쟁력과 정체성이 기업 수장의 카리스마와 리더십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이 회장의 존재감을 소비자에게 각인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제2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에는 삼성전자가 1위 영역을 수성하는 전략에서 나아가 경쟁사가 따라잡을 수 없는 새로운 초격차 영역을 설정하는 ‘딥 다이브’(시장을 주도하는 심층적으로 특화한 영역) 전략이 포함돼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핵심은 인공지능(AI)이다. 그룹 전체 밸류체인을 활용해 AI 영역에서 글로벌 빅테크를 능가하는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삼성의 포스트 딥 다이브로 꼽힌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핀란드 경제의 30% 이상을 책임졌던 노키아는 기존 휴대폰에서 스마트폰으로 수요가 변하는 데 대비하지 못해 몰락했다”면서 “고대역폭메모리(HBM) 경쟁에서 밀리는 삼성전자를 보면 노키아가 떠오른다”고 꼬집었다. 그는 이어 “반도체 파운드리 경쟁사인 대만 TSMC의 경우 삼성전자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경쟁력을 발휘할 수 없고, 미국의 인텔 역시 특화기술 외엔 다양성이 부족하다”며 “반도체와 가전, 스마트폰 등 다양한 분야에서 경쟁력을 갖춘 삼성전자가 AI 시대를 주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삼성전자 곳간에 쌓인 대규모의 현금(유보금)을 성장 잠재력이 있는 기업 인수·합병(M&A)에 과감히 사용하는 것도 위기 극복의 한 방안으로 꼽힌다. 황 교수는 “액세서리 같은 기업이 아니라 삼성의 핵심 미래를 이끌 수 있는 기업 인수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성장에 탄력을 줄 수 있는 외부 환경이 조성되는 것도 시급하다. 주52시간제에 얽매여 혁신에 집중하지 못하는 등 사회 규제 장벽 해소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전문대학원장은 “주52시간을 넘기는 초과근무를 법적으로 허용하지 않다 보니 업무를 유연하게 조정해야 할 특수한 상황에 대처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면서 “주, 월, 분기, 반기, 연 단위로 연장근로 시간의 총량을 부서나 사업 성격에 맞게 선택할 수 있도록 규제를 유연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회장을 둘러싼 사법 리스크가 조기에 해소될 필요성도 있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이 회장은 재판에 쫓겨 경영에 집중할 수 없는 시간을 수년째 겪고 있다”면서 “책임경영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고 말했다. ‘대기업 특혜’라는 비판을 의식해 세계 곳곳에서 펼쳐지는 반도체 보조금 경쟁에 뛰어들지 않는 한국 정부의 정책 변화도 요구된다. 황 교수는 “한국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 있기 때문에 산업경쟁력을 위해서라도 맞불을 놔야 한다”면서 “해외 유수 기업들은 이미 국가로부터 직접 지원을 받는 만큼 한국도 명분이 살아 있다”고 말했다.

전성필 황민혁 김지훈 기자 f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