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우리에게 여러 번의 삶이 주어진다면

입력 2024-10-21 00:35

한 사람에게 주어진 여러 개의 삶을 상상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우리는 모두 세계 어딘가에 흩어진 입자였다가, 인간의 형태로 모여들었다가, 다시 입자의 처지로 돌아가는 것이므로 완전한 의미의 이전 삶이란 없다고 말하는 편이 옳겠지만, 우리는 모두 한 번쯤 식물이거나 동물이거나 우주를 이루는 별이었을 수도 있다.

친한 친구들과 모이면 꼭 함께 보는 영상이 하나 있다. ‘아메리카 갓 탤런트’에 출연한 13살 코트니 해드윈의 무대다. 수줍은 얼굴이던 어린 학생이 순식간에 얼굴이 돌변하고 이성을 잃으며 음악에 몰두한다. 과거 록스타를 연상시키는 열광적인 무대가 끝나자 관객 모두 일어나 기립박수를 친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은 흥분하여 “당신은 이 시대 사람이 아니에요. 완전히 다른 시대에서 왔군요”라고 외치며 골든 버저를 눌러 그를 단번에 합격시킨다.

코트니처럼 이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친구들을 보면 저 독특함의 배후는 무엇일지 상상해 본다. 이를테면 요즘도 오래전 유행했던 포스트 펑크 음악을 듣는 나의 친구. 그의 예전 삶은 어쩐지 80년대 영국 청소년이었을 것 같다. 에코 페미니즘과 비거니즘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우드스톡 페스티벌의 히피들을 떠올리게 하고, 라캉의 텍스트에 빠져 그 해석에 한 생애를 다 바치는 선생님은 분명 전생에 유럽의 아카데미에 속해 있었을 것 같다.

이렇게 많은 문화를 다채롭게 누릴 수 있는 시대에 개인의 취향과 기질은 어떻게 연유하는 것인가? 내가 세대론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마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시공간은 그런 식으로 분리되지 않으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개인의 신체를 매개하여 서로 파악될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한다. 시대의 보편적 영향력으로부터 조금씩 비켜나 있는 사람들. 혹은 그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들. 그들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현재가 언제나 더욱 궁금해진다.

김선오 시인